[ 이라크, 바그다드, 그린존 ]
그린존은 폐쇄되었다. 원천적으로 CPA가 본국의 명령에 의해 철수를 하는 시점에서부터 그랬어야 했다. 이 먼지와 폐허의 도시는 전쟁 이전이나 전쟁 이후가 별반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그린존이야 그런대로 사람이 살만한, 아니 군인에 의해 딱 필요한 수준까지만 그런대로 도시의 모습이 복원되었다면 그 경계선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시아파와 수니파 추종자 간의 알력이 궁전 안에서만 이뤄졌던 것이 과거였다면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사람들조차 자기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람들 간의 관계를 조심해야 했다. 전쟁이 가져다준 파괴는 알력만 제외하고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들이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 후 펼쳐진 국가 재건 사업들이 알력 다툼으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행정 수반들은 반대 세력의 모함에 곧잘 바뀌었고 어렵게 합의된 계획들은 실행 과정에서 중단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전쟁이 저강도 분쟁으로 바뀌면서부터 행정기구의 기능 대신 군사기지의 기능이 되살아났다. 가장 불안정한 지역에 중동 지역에 파견된 각 군의 사령부들이 자리 잡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 바뀌었을 뿐 도시에 군인들은 그대로였다.
"... 노인네께서 들으시면 뒤집어지겠군."
노딩턴 대위는 처음부터 입맛이 썼다. 아프간에서 전해진 냉동 장난감 박스 소식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 즉 민간인만 모르고 모든 총잡이들이 알게 된 사실이 되었다. 노딩턴은 불과 하루 전에 브뤼셀로 불려 간 사령관으로부터 '전 부대 경계 태세 유지'라는 고리타분한 명령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전선이 조용하긴 했으나 적어도 이 바그다드는 아니었다. 유럽 봉쇄안과는 상관없이 바그다드에서는 3시간 간격으로 총격전 보고가 오고 있었고 3일 간격으로 폭탄이 터져되는 형국이었다.
그린존이라는 안전해 보이는 지명과는 달리 이곳은 거의 레드존으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대원들에게 필요한 건 휴식과 안정이었지 경계 태세 유지 같은 명령은 아니었다. 잠시라도 좋았으니 긴장을 늦출 수 있는 어떠한 방책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곳 그린존의 특성상 불가능한 요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몽땅 차 타고 돌고 있거나 발로 뛰고 있는 상태인데 뭘 더 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
직속 부하이면서 동시에 후배이기도 한 루 중위의 말을 들으며 대위는 반문했다. 출동 상태인 대원들에게 할 일을 하나 더 부여하는 건 사실 일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블랙리스트와 작전 명령서, 정보 파일들엔 잡아야 하거나 확보해야 할 물건들이 사전 두께로 쌓여있는 상태였으니. 바그다드에서 널리 도는 말 중에 하나가 미군들의 리스트에 없으면 악당이 아니다 라는 거였다. 과도하게 비대한 도시에서 치안력이 싹 사라진 지금 그 역할을 대신 담당할 수 있는 건 미군을 대신해서 온 유럽 원정군이었다.
10여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한 미군과는 달리 유럽 본토에서 넘어온 친구들은 저강도 분쟁에 익숙하지 않으니 애를 먹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병력도 적었다. 수학 공식도 아니었지만 고생의 강도는 병력의 수에 비례해서 커져만 갔으나 어찌 되었든 이라크를 안정화시켜야만 했다. 밀릴 곳도 없긴 했지만 그린존을 잃으면 이라크를 위시한 중동 국가들에게 통제력을 실행할 발판이 이제 어디에도 없어지는 셈이니까...
"가진 자원은 없지만 폭탄이라도 터지면 곤란하니까 길바닥이라도 훑어보기로 하지. 고속도로 순찰대 친구들은 동원 가능할까?"
"그 양키들이 하는 일이 밥 먹고, 차 타고, 총 쏘러 가는 거니까요. 요청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잘 설명해줘. 애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사랑을 잊으면 안 돼."
"난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대위님 연애관이 참 의심스럽단 말입니다."
미군은 떠났고 그 대신 미묘한 규모의 미국 소재 경호원들이 들어왔다. 말이 경호원이지 제2 차 이라크 전쟁 때 참전했던 미군들이 퇴역하고 사적인 신분으로 다시 돌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미국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이거였다. 군사 영역 중에 사영화라는 미명 하에 많은 부분들이 민간 업체에게 위탁되었고 전투 영역을 제외한 군수, 수송, 건설 부분은 민간 업자들의 놀이터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업체가 이 전쟁 시장에 참여했고 각자 세련된 방식으로 사업을 하겠다며 뽐냈지만 초기의 거품이 꺼지고 지금 남은 건 중세 시대의 용병이었다. 지금 그린존에서 총을 들고 다니는 부류는 2종류였다. 하나는 유럽 본토에서 넘어온 유럽 사나이와 숙녀들, 다른 하나는 유럽 사나이들처럼 한때는 총을 들고 다녔을 것 같은 아저씨들. 이들이 바로 통칭 경호원이라 불리는 이들의 정체였다.
이 미묘한 배경을 가진 민간인들이 여전히 폭탄이 터져되는 이곳 그린존에서 방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참 볼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고속도로 순찰대도 그런 부류였다. CPA 시절에 이곳 이라크에서 똑같은 일을 하던 전직 미군들이 하청식으로 도로 '파견'을 온 상태였다. 민간업체 소속으로 이들은 군대의 명령과 지휘계통과는 상관없었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지만 일거리가 없을 때나 원래 업무가 긴급한 사항 때문에 취소되면 같은 곳에 있는 유럽 원정군에게 현장에서 곧잘 하청을 받곤 했다. 이들 말을 빌리면 '보너스'를 구두로, 혹은 본사에 통보하여 팩스로 계약서류를 전송받은 뒤에 사인만 하고 일을 하는 셈이었다.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태연히 벌어지고 있었지만 유엔 안보리나 당사국 간에서는 쉬쉬하며 묵인하고 있었다. 이것도 전쟁에 묻혀버린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한 팀이 빈다고 하네요. 68 텍사스팀이 맡아준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침묵과 설명을 반복하던 루 중위가 결국 일감을 맡을 팀을 물색해 냈다. 그는 이제 이런 일에 이골이 날만큼 난 상태였다. 관할 지역에서 총을 든 민간인들이 자기네만큼이나 많아 충격을 받았던 게 이라크에서의 첫인상이었다. 예전보다는 그래도 덜했지만 담배 연기를 풍기며 M4 카빈을 치켜든 채 탄약을 가득 소지한 털북숭이 양키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터였다. 아버지뻘이 되는 사람이 털북숭이 아저씨들을 이끌고 지옥의 고속도로로 향하는 맥에 올라타는 걸 보며 경이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가장 충격적인 건 거리에서 벌어진 총격전에 소대와 순찰팀이 급히 한 건물에 숨었을 때였다. 루 중위는 그들과 함께 임시방편으로 건물을 토치카로 만들어 버리고 응전을 한참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탄약이 소진되어 탄약 후송을 긴급히 요청하였으나 때마침 반군의 로켓 공격으로 헬기 한 대가 격추되어 버려서 항공 작전에 차질을 먹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순찰대 친구들이 자기네 회사에 '전화'를 해서 블랙버드에 탄약을 가득 실고 오라고 외칠 때만 해도 루 중위는 이들이 무슨 전투 상황에 미쳐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정말로 블랙버드가 날아와 자신들이 있는 건물 옥상에 비스듬히 착륙하고 보고 나서는 이제 이런 전쟁 상황에 대해 편견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는 루 중위 자신이 사설 경호원과 업체의 연락관 비슷한 업무를 다 맡아 진행하였다.
"좋아, 일감 맡아줄 사람을 찾았으니 일을 만들어 보자고. 본부에서 온 서류 줘봐."
루 중위가 내민 작전 명령서를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남북을 길게 가로지르는 순찰 구역 표시였다. 1개 사단 병력이 남북으로 약 50km에 이르는 순찰 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걸 달리 풀어쓰면 가느다란 실 한 오라기에 좁쌀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다고 노딩턴 대위 자신이 평가한 적이 있었다. 명령서는 그중에서도 슐레이 마니아와 쿠트를 잇는 여러 개의 경계 구역을 특별히 지목하고 있었고 아프간에서 갓 발견된 따끈따끈한 트럭 한 대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저 트럭이 바로 이 야단법석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고 이제 허탕을 친 아프간 원정군을 대신해 노딩턴 대위와 루 중위가 합심하여 '양키 회사원'들의 도움을 받아 추적을 해야 했다. 참으로 이상한 연합 작전인 셈이다.
"헤라트 서부 국경을 바로 넘어온다고 했나? 마지막 위치가 어디였지?"
"이란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답니다. 탈레간 지방 연결 도로의 중간에서 버려진 트럭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이게 그 사진이고요."
사진으로 찍힌 트럭은 버려진 뒤에 고고도에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서방과의 교류에 폐쇄 정책을 취하기로 마음먹은 이란이 고슴도치처럼 각종 무기들을 앞세워 으름장을 날리는 통에 제대로 된 정보를 취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진도 미국에서 감시 위성을 통해 찍은 비싼 자료였다. UAV 들을 동원해 정보를 취득하려고 해도 러시아에서 최신 레이더 기술과 장비를 공수해 영공을 거의 덮어버리다시피 배치해 버린 탓에 날리는 족족 전자기파 교란으로 추락해 버리곤 했다. 때문에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저 높은 곳에서 직접 구하거나 그 주변국들을 구슬려 정보를 캐내는 수 밖엔 없었다.
"산 중턱에서 다른 차량으로 바꿔 또 이곳, 이라크로 향한다... 라."
"그냥 봐도 느껴지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뭔가를 하다가 발견된 적은 없었죠."
"그래, 그렇지... 그런데도 놓쳤으니 아예 정보 통제도 안 하는구먼."
노딩턴 대위는 몇 시간 전부터 위성 TV의 BBC 뉴스가 이 트럭이 아프간 국경을 돌파했다고 계속 반복해서 떠드는 것을 거론했다. 언론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유럽 원정군이나 현재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저 트럭과 6개의 장난감 상자였다. 그중 2개는 '제거'했고 4개는 추적 중이었다. 노딩턴 대위는 장난감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정말 긍금해지기 시작했다.
"공중 지원은 없나? 68 텍사스팀은 자기네들 트럭 외엔 안 타려고 할 텐데."
"블랙호크에 태우려고 해도 문제입니다. 그거야말로 범법 행위로써 문책당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공중 지원?"
"... 우리가 나가야 됩니다."
"뭐?"
"우리요. 대위님 하고 저요. 그 블랙호크, 저희가 타야 됩니다."
"명령인가, 소위?"
"중위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뒷장을 안 보셨군요. 사령관님의 추가 지시가 있었습니다."
노딩턴 대위는 부랴부랴 그 뒷장을 찾아 넘겼다. 책상머리가 MCOM을 하는 건 흔치 않았다. 하지만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이라크에서 지금의 명령처럼 블랙호크에 탑승해서 90년대처럼 무전기를 붙잡고 8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색다른 경험이긴 하지만 총알받이라도 되는 순간엔 지옥으로 직행하는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들어 노딩턴 대위는 별로 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Commanding Group 인 자신의 직책을 부정할 수는 없고, 더욱이 노인네가 직접 추가한 별칙 부록 같은 명령을 거부할 방법도 없었다.
"68 텍사스는 땅에, 우린 하늘에?"
"네, 그렇습니다. 대위님."
"블랙호크는 누가 조종하는데?"
"바렛 소위입니다."
"여자애?"
"네, 그렇습니다. 대위님. 바네사 M. 크로체스터 소위가 기장입니다."
일부러 대답에 강단을 넣은 루 중위의 능글맞음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노딩턴 대위의 머릿속에선 빨강머리에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철없는' 소위의 모습이 당장 떠올랐다. 지원 동기가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군인의 경력이 필요하다는 이 아가씨야말로 현재 유럽 원정군의 분위기를 아낌없이 나타내 주는 증표라고 수없이 루 중위에게 되뇌었던 그였다. 모든 병력이 전부 가동 중인 상태라 이젠 그 악평이 자자한 소위와 함께 아주 오랫동안 붙어 있어야 했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을 수밖에...
"좋아, 능글맞은 양키들과 봄 망아지랑 가보자고."
"2번 헬리 포드에 대기 중이니 가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장비나 챙겨 와. 난 탄약 좀 더 받으러 갔다 올 테니까."
"탄약이요?"
"떨어졌을 때를 생각해야 할 거 아냐. 멀쩡히 돌아올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남긴 채 노딩턴 대위는 루 중위를 남겨놓고 작전실을 힘없이 빠져나갔다. 아무리 악평에 시달리는 바렛 소위였지만 가끔씩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빼고는 근무 성적은 좋았다. 아니 무엇보다도 작전 출격이 25회에 이르렀지만 아직 총알 자국 하나 없는 블랙호크를 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격전지를 안 간 것도 아니었다. 이번 출격 또한 그녀의 행운에 작게나마 기대 보기로 하고 루 중위는 68 텍사스 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