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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만 글

by OUO

연필로 글을 쓰는 일은 꽤나 드물어진 거 같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면 몰라도,

연필은 사실 그림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 글을 쓸 때 연필은 꽤나 서운했을 것 같다

그래서 연필을 쓰는 일이 드물어진 지금은

나는 연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 아이구나

미안한 마음이 드물게, 연필을, 연필이 드물게 쓸 때마다 난다


있잖아, 연필은 참 불행한 거 같아

가슴 한 가운데 흑연이 박혀있잖아

흑연, 검은 인연의 준말일 거야

그래서 검은 것은 쉽게 지워지고

손에 묻고, 남을 찌르고, 뭉툭해져서

부러지고


연필 흔적을 지우려다가 종이가 다 찢어진 적이 있다

고작 검은 자국 하나 지우겠다고 온 힘을 다 쓰다가

흰 종이를 다 못쓰게 된 거야

그러면 다시 다른 흰 종이를 가져와서 처음부터 다시 적어야 하고

흰 것, 검은 것.

그러면 나는 흰색을 더 좋아했나 보다

흔하지 않은 차별은 아니고

흰색과 검은색이 물에 빠지면 흰색을 구하겠지만

사실 흰 종이는 이미 다 젖어서 구해봤자 찢어질 운명인데

검은 연필은 다시 건져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검은 건 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물에 빠진 둘 다 구하려고 할 것 같다

그리고 검은 것들이 가라앉으면 나는 속이 후련하면서도

흰색이 내 톤과 맞지 않아서

검은 옷을 그리워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흰색 니트에

검은색 머금은 바지를 입고 있는데

어쩌면 나한테도 두 가지 인연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건 벌처럼 검게 물들어서

다 쓰거나 다 지워버리거나

그래야만 사라지는 흔적일 거라고

뚝, 하고 부러지는 연필심이

조금 어두운 안녕을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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