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중학생 때까지 자다가 지도를 그렸다.
꿈에서 변기에 앉으면 어김없이 이불이 축축해졌다.
그런데 이 일로 혼난 적이 없다.
유치원, 초등학생 때는 자다가 배가 고프거나 이불에 실수하면 엄마를 깨웠다.
밤중에 엄마는 밥을 차려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셨다.
짜증 한번 내지 않으셨다.
신기한 일이다.
엄마도 사람인데 어떻게 번번이 그냥 넘어가셨을까?
우리 엄마는 '호랑이가 물어갈 년'이라는 욕을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 자랐다고 했다.
엄마는 5남매 중 둘째다.
외할아버지의 체격을 닮아 건장해서였을까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학교 갔다 오면 누에와 소를 돌봤다.
풀 먹이러 들로 나갔다가 소가 엄마를 뿔로 박아서 몸이 날아간 적도 있다.
어린 동생을 포대기로 업고 구슬치기한 게 유일한 놀이였다.
개울에서 방망이로 두드려가며 빨래를 했는데 겨울도 예외는 아니라 빨개진 손으로 돌아왔다.
농부였던 외할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했고
논에 새참 갖다주고, 집집마다 다니며 곗돈 받아오는 외할머니의 심부름도 일상이었다.
엄마는 이따금씩 마을버스를 보며 산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우직하게 소처럼 일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읍내로 유학 간 건 언니였고 손에 잡힐만한 걸 쟁취해 내는 건 바로 밑의 여동생이었다.
다림질할 때 빨랫감 한쪽 끝을 놓쳤다는 이유로 외할머니가 인두로 엄마 다리를 지졌던 날,
엄마는 외할머니가 계모라고 확신했다.
엄마가 어른이 되어 여느 때처럼 방을 닦다가 걸레를 바닥에 내리친 게 첫 반항이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등쌀에 못 이겨 선을 봤다.
결혼에 확신도 없었는데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3개월 만에 식을 올렸다.
우리 엄마는 자라면서 무슨 사랑을 받았나.
중학생 때까지 자다가 실수하는 나에게 엄마는 어떻게 면박 한번 주지 않고 이불빨래를 했을까.
밤중에 배고프다고 깨워도 엄마는 어떻게 싫은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부엌에 가셨을까.
엄마가 받은 사랑이 어딨다고 나에게 줬을까.
엄마는 내가 집안일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중에 실컷 할 텐데 뭘 벌써부터 하냐고.
자라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엄마가 나한테는 하지 마라고 했다.
엄마는 일찌감치 말했다.
결혼 안 해도 되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라고,
그러면 됐다고.
외할머니는 엄마를 '호랑이가 물어갈 년'이라고 불렀지만
엄마는 나를 '모쪼시'라고 불렀다.
찹쌀모찌 같다면서 애정을 담아 부르곤 했다.
엄마는 어떻게 쓴 뿌리를 잘라내고 나에겐 좋은 것만 주려 했을까.
그거 참 대단한 건데.
놀랍다.
받은 적 없는 사랑을 나에게 준 엄마 덕분에
내가 엄마노릇을 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