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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용 Jan 26. 2023

그때 그 저녁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엄마의 야단에
펄펄 끓어넘치던 솥 눈물 같은 설움이
동생 등을 밟고 설강에서 꺼낸 성냥갑 위로 왈칵 쏟아졌다

  꽃의 여왕 붉은 장미가 담장을 넘으면 푸른 종아리에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잎사귀의 몸집을 키운다. 

 겨우내 움츠렸던 꼬마들의 기지개도 덩달아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따라 마을 어귀 당상 나무 밑에서 체력을 키운다. 

 종일 뛰놀다 해가 기울면 집집마다 쌀 안치는 소리로 마을이 저문데 밭 매러 간 우리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엄마의 가르침보다 더 빠른 눈썰미가 여기저기 뒤지지 않아도 광에서 부엌까지 종종거리며 깨금발을 한다. 

 ‘날콩가루를 한주먹 넣어야 구수한 맛이 나는게야’라는 엄마의 혼잣말이 생각나 양푼을 들고 다시 광으로 가서 포대 자루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둥글게 저녁을 치댄 밀가루 반죽이 홍두깨에 밀릴 때마다 밭으로 마중 나간 칭찬소리가 “우리딸? 아이고 기특해라”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종정거리던 저녁 준비가 끝나자 워낭소리와 함께 엄마의 검정 고무신이 부엌 문지방을 넘었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누가 너보고 저녁해 놓으라고 했어?”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엄마의 야단에 펄펄 끓어넘치던 솥 눈물 같은 설움이 동생 등을 밟고 설강에서 꺼낸 성냥갑 위로 왈칵 쏟아졌다.     

  여름 땡볕에 쑥쑥 자란 부추 같은 앞 머리가 내 눈을 찌르자 엄마는 작정한 듯 보자기와 가위를 들고 삽작문 앞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던 나를 헛간으로 데려갔다.  방금 동생이 썼던 바가지를 내 머리에 씌우고 부추 밑동을 자르듯 거침없이 싹둑 싹둑 가위질을 했다. 

 지나가는 또래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스타일이 망가진다며 등짝을 때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미용실에서 단발머리를 하고 온 봉자의 모습이 떠올라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짭짭한 액체가 쌓인 머리칼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머리 손질이 끝나면 엄마는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찬물을 올려서 머리를 감겨 주셨는데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봉자에 대한 부러움을 싹 앗아가 버렸다.      

  가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 벼들이 누런 황금빛으로 출렁이면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의 점심을 챙겨 수북한 풀숲을 작대기로 툭툭 치며 굽이진 논둑길을 한참 걸어 갔다. 

 아버지는 멀리서 우리를 보고 뱀 조심하라고 활처럼 굽었던 허리를 펴시며 손을 몇 번씩 흔들었다. 

 들고 온 찬합을 나무 그늘에 내려놓고 건초를 긁어모아 둔 방석에 누워 아버지의 고수레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다. 

 갈무리 소리에 잠이 깬 막내를 지게에 태우고 두 딸은 아버지의 양손을 잡고 찬합에서 달랑거리는 알밤 소리를 들으며 노을 진 마을에 번지는 연기의 행방을 찾아 집으로 향했다.     

  겨울 아침엔 눈 쌓인 신작로에 나가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보이면 부뚜막에 올려 놓은 따뜻한 신발을 신겨 정거장까지 업고 나와 버스에 태워 주며 오늘도 조심하라는 신신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엿장수를 만나면 아이들이 집에서 쇠붙이를 하나둘씩 가지고 나왔다. 

 잘 드는 낫을 가져오기도 하고, 뒤축이 닳은 구두를 가져오기도 하고, 물이 묻은 양푼을 들고 나와 엿이랑 바꿔 먹는 걸 보고 나도 집으로 뛰어가 앉은뱅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시계추를 떼어 달아났다. 

 저녁 연속극 시간이 되어도 울리지 않는 괘종시계를 보고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물으며 “낼모레 시장에서 엿이랑 센베이 과자를 사다 줄 테니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타일렀는데 엄마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서 바느질을 하면서 자는 척하는 내 머리를 자꾸 쥐어박았다.     

  오늘 시골에서 택배로 보내온 감자랑 호박을 보더니 남편이 손칼국수를 해 먹자고 했다. 

 밀가루에 날콩가루 대신 계란을 넣고 반죽을 치대자 홍두깨 밑으로 그때 그 저녁이 둥글게 밀리며 주방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부뚜막을 때렸던 엄마의 음성으로 냄비에 가득 번진

 

  꽃의 여왕 붉은 장미가 담장을 넘으면 푸른 종아리에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잎사귀의 몸집을 키운다. 

 겨우내 움츠렸던 꼬마들의 기지개도 덩달아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따라 마을 어귀 당상 나무 밑에서 체력을 키운다. 

 종일 뛰놀다 해가 기울면 집집마다 쌀 안치는 소리로 마을이 저문데 밭 매러 간 우리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엄마의 가르침보다 더 빠른 눈썰미가 여기저기 뒤지지 않아도 광에서 부엌까지 종종거리며 깨금발을 한다. 

 ‘날콩가루를 한주먹 넣어야 구수한 맛이 나는게야’라는 엄마의 혼잣말이 생각나 양푼을 들고 다시 광으로 가서 포대 자루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둥글게 저녁을 치댄 밀가루 반죽이 홍두깨에 밀릴 때마다 밭으로 마중 나간 칭찬소리가 “우리딸? 아이고 기특해라”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종정거리던 저녁 준비가 끝나자 워낭소리와 함께 엄마의 검정 고무신이 부엌 문지방을 넘었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누가 너보고 저녁해 놓으라고 했어?”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엄마의 야단에 펄펄 끓어넘치던 솥 눈물 같은 설움이 동생 등을 밟고 설강에서 꺼낸 성냥갑 위로 왈칵 쏟아졌다.     

  여름 땡볕에 쑥쑥 자란 부추 같은 앞 머리가 내 눈을 찌르자 엄마는 작정한 듯 보자기와 가위를 들고 삽작문 앞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던 나를 헛간으로 데려갔다.  방금 동생이 썼던 바가지를 내 머리에 씌우고 부추 밑동을 자르듯 거침없이 싹둑 싹둑 가위질을 했다. 

 지나가는 또래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스타일이 망가진다며 등짝을 때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미용실에서 단발머리를 하고 온 봉자의 모습이 떠올라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짭짭한 액체가 쌓인 머리칼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머리 손질이 끝나면 엄마는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찬물을 올려서 머리를 감겨 주셨는데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봉자에 대한 부러움을 싹 앗아가 버렸다.      

  가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 벼들이 누런 황금빛으로 출렁이면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의 점심을 챙겨 수북한 풀숲을 작대기로 툭툭 치며 굽이진 논둑길을 한참 걸어 갔다. 

 아버지는 멀리서 우리를 보고 뱀 조심하라고 활처럼 굽었던 허리를 펴시며 손을 몇 번씩 흔들었다. 

 들고 온 찬합을 나무 그늘에 내려놓고 건초를 긁어모아 둔 방석에 누워 아버지의 고수레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다. 

 갈무리 소리에 잠이 깬 막내를 지게에 태우고 두 딸은 아버지의 양손을 잡고 찬합에서 달랑거리는 알밤 소리를 들으며 노을 진 마을에 번지는 연기의 행방을 찾아 집으로 향했다.     

  겨울 아침엔 눈 쌓인 신작로에 나가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보이면 부뚜막에 올려 놓은 따뜻한 신발을 신겨 정거장까지 업고 나와 버스에 태워 주며 오늘도 조심하라는 신신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엿장수를 만나면 아이들이 집에서 쇠붙이를 하나둘씩 가지고 나왔다. 

 잘 드는 낫을 가져오기도 하고, 뒤축이 닳은 구두를 가져오기도 하고, 물이 묻은 양푼을 들고 나와 엿이랑 바꿔 먹는 걸 보고 나도 집으로 뛰어가 앉은뱅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시계추를 떼어 달아났다. 

 저녁 연속극 시간이 되어도 울리지 않는 괘종시계를 보고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물으며 “낼모레 시장에서 엿이랑 센베이 과자를 사다 줄 테니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타일렀는데 엄마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서 바느질을 하면서 자는 척하는 내 머리를 자꾸 쥐어박았다.     

  오늘 시골에서 택배로 보내온 감자랑 호박을 보더니 남편이 손칼국수를 해 먹자고 했다. 

 밀가루에 날콩가루 대신 계란을 넣고 반죽을 치대자 홍두깨 밑으로 그때 그 저녁이 둥글게 밀리며 주방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부뚜막을 때렸던 엄마의 음성으로 냄비에 가득 번진다.

그때 그 저녁

 

  꽃의 여왕 붉은 장미가 담장을 넘으면 푸른 종아리에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잎사귀의 몸집을 키운다. 

 겨우내 움츠렸던 꼬마들의 기지개도 덩달아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따라 마을 어귀 당상 나무 밑에서 체력을 키운다. 

 종일 뛰놀다 해가 기울면 집집마다 쌀 안치는 소리로 마을이 저문데 밭 매러 간 우리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엄마의 가르침보다 더 빠른 눈썰미가 여기저기 뒤지지 않아도 광에서 부엌까지 종종거리며 깨금발을 한다. 

 ‘날콩가루를 한주먹 넣어야 구수한 맛이 나는게야’라는 엄마의 혼잣말이 생각나 양푼을 들고 다시 광으로 가서 포대 자루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둥글게 저녁을 치댄 밀가루 반죽이 홍두깨에 밀릴 때마다 밭으로 마중 나간 칭찬소리가 “우리딸? 아이고 기특해라”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양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종정거리던 저녁 준비가 끝나자 워낭소리와 함께 엄마의 검정 고무신이 부엌 문지방을 넘었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누가 너보고 저녁해 놓으라고 했어?”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엄마의 야단에 펄펄 끓어넘치던 솥 눈물 같은 설움이 동생 등을 밟고 설강에서 꺼낸 성냥갑 위로 왈칵 쏟아졌다.   

  

  여름 땡볕에 쑥쑥 자란 부추 같은 앞 머리가 내 눈을 찌르자 엄마는 작정한 듯 보자기와 가위를 들고 삽작문 앞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던 나를 헛간으로 데려갔다.  방금 동생이 썼던 바가지를 내 머리에 씌우고 부추 밑동을 자르듯 거침없이 싹둑 싹둑 가위질을 했다. 

 지나가는 또래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스타일이 망가진다며 등짝을 때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미용실에서 단발머리를 하고 온 봉자의 모습이 떠올라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짭짭한 액체가 쌓인 머리칼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머리 손질이 끝나면 엄마는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찬물을 올려서 머리를 감겨 주셨는데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봉자에 대한 부러움을 싹 앗아가 버렸다.   

   

  가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 벼들이 누런 황금빛으로 출렁이면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의 점심을 챙겨 수북한 풀숲을 작대기로 툭툭 치며 굽이진 논둑길을 한참 걸어 갔다. 

 아버지는 멀리서 우리를 보고 뱀 조심하라고 활처럼 굽었던 허리를 펴시며 손을 몇 번씩 흔들었다. 

 들고 온 찬합을 나무 그늘에 내려놓고 건초를 긁어모아 둔 방석에 누워 아버지의 고수레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다. 

 갈무리 소리에 잠이 깬 막내를 지게에 태우고 두 딸은 아버지의 양손을 잡고 찬합에서 달랑거리는 알밤 소리를 들으며 노을 진 마을에 번지는 연기의 행방을 찾아 집으로 향했다. 

    

  겨울 아침엔 눈 쌓인 신작로에 나가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보이면 부뚜막에 올려 놓은 따뜻한 신발을 신겨 정거장까지 업고 나와 버스에 태워 주며 오늘도 조심하라는 신신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엿장수를 만나면 아이들이 집에서 쇠붙이를 하나둘씩 가지고 나왔다. 

 잘 드는 낫을 가져오기도 하고, 뒤축이 닳은 구두를 가져오기도 하고, 물이 묻은 양푼을 들고 나와 엿이랑 바꿔 먹는 걸 보고 나도 집으로 뛰어가 앉은뱅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시계추를 떼어 달아났다. 

 저녁 연속극 시간이 되어도 울리지 않는 괘종시계를 보고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물으며 “낼모레 시장에서 엿이랑 센베이 과자를 사다 줄 테니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타일렀는데 엄마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서 바느질을 하면서 자는 척하는 내 머리를 자꾸 쥐어박았다. 

    

  오늘 시골에서 택배로 보내온 감자랑 호박을 보더니 남편이 손칼국수를 해 먹자고 했다. 

 밀가루에 날콩가루 대신 계란을 넣고 반죽을 치대자 홍두깨 밑으로 그때 그 저녁이 둥글게 밀리며 주방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부뚜막을 때렸던 엄마의 음성으로 냄비에 가득 번진다.


이 글은 세종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편입후 중간고사 우수과제에 대한 교수님의 피드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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