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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Feb 16. 2022

생활의 향기

무소유의 삶이 주는 자유

 현대 사회는 물질의 풍요와 지나친 소비와 그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사물에 대한 의식 안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물질을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어느새부턴가가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되었고, 그러한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흐름에 맞춰 살기를 수긍하고 감수한다.   

 돈이면 안 될 것이 없다는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들은 돈 있는 사람은 귀족, 돈 없는 사람은 천민으로 전락해버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온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돈이 가진 위력에 얼마만큼 지배당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인간 욕망의 근원인 돈에 대한 탐욕은 지위나 계층에 상관없이 발생하고 있다. 대통령도 종교인도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들도 돈 앞에서는 범상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진 자는 가진 자 대로 더 가지려 하고 없는 사람은 필요해서 가지려 한다.

 욕망을 버림으로 해서 자유를 얻은 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는, 2,500년 전 이미 욕망의 끝이 주는 허망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소유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특권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무소유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유의 사상가였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부터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을 추구했다. 디오게네스는 국적이 없는 세계시민 즉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인을 자처하고, 유일하게 올바른 국가는 세계적인 규모의 국가라고 주장하여 세계시민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흑해 연안 시노페 출신의 는 세상이 너무 어두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현자를 찾는다고 대낮에도 등물을 들고 다녔다. 그는 시체를 묻는 데 사용하는 커다란 통(개집이라는 설도 있음) 속에 살았다.

 그의 유일한 재산이라고는 나무의 속을 비워낸 것으로 만든 물그릇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온 뒤에 생긴 물구덩이에서, 개가 그릇도 없이 고인 물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크게 반성을 하여 그 물그릇마저 깨뜨려버렸다. 그 하나 있는 물그릇마저 그는 욕망의 근원으로 보고 미련 없이 버렸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 중심의 삶’과 ‘소유 중심의 삶을 구별하고 있다. 소유 중심의 삶은 자유롭지 못한 삶이다. 물질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한다. 대문 앞에 방범창을 달고, 담 높은 곳엔 전기 철조망까지 달아놓아서 마치 교도소 같은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요즘은 자동경보시스템을 비롯하여 CCTV까지 설치하고 있어서 스스로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외에도 더 가지기 위해 더 큰 욕망을 키워나간다. 권력자들에게 아첨하고 권모술수도 서슴지 않고 부린다.

 가진 자들에게 욕망의 끝이란 없다. 끊임없이 물질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다가 결국은 물질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반면에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극빈자들은 문을 있는 대로 열어놓아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기 않는다. 훔치러 와서 오히려 보태주고 가야 할 상황이므로 도둑들이 피해 다닌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들에겐 욕망에 앞서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행복이 우선시 된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의 유명한 일화가 무소유의 삶이 사람을 얼마나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것인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통 속에서 벌거벗은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찾아왔다. 세계를 정복해서 부러울 것이 없는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그대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디오게네스는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나시오.”

 그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말했다.

 “만일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기꺼이 디오게네스이고 싶다.”

  권력의 정점에 선 알렉산드로스가 몹시도 부러워한 철학자-그가 바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으로 자유를 획득한 디오게네스였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디오게네스가 단순히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권력과 부, 본능과 쾌락을 무시했거나 그런 것들에 초연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도도하고 당당하게 그런 것들을 거부했고, 무권력과 가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불결함, 구걸하는 처지, 추함, 모욕, 노예상태 등 가난이 낳는 모든 불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내세웠다. 그런 그의 태도는 동물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개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개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무욕의 삶이 참된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매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려갈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하지만 그 욕망의 끝에 다다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파멸한 순간에 현실을 비로소 바로 보게 된다. 그것을 2,500년 전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가르쳐서 주입시키는 것보다 스스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패륜도 서슴지 않는 현대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향한 날카로운 경고문인 것이다.

 디오게네스의 무소유의 삶은 법정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법정은 수필⌜무소유⌟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욕심 또는 집착에서 해방될 때 얻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소유는 소유보다 더 큰 마음의 평정과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소유의 삶이 소유의 삶 보다, 보다 높은 차원의 삶임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디오게네스는 소유와 발전만을 강조하는 세상의 통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무소유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음을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무소유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한 번쯤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소유의 철학이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경고하는 지도 깨달아야 한다.(서양 고대철학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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