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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Mar 07. 2022

생활의 향기

현충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한동안 기승을 올리던 강추위가 몰려가고, 얼음이 풀려 춥지 않았던 2월 마지막 날, 볕이 잘 드는 대전 국립현충원 언덕에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백마고지 전투 중 다치신 아버지께서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가시고 싶다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총탄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 오직 고지를 빼앗기지 않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싸우셨던 아버지께서는,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영면에 들어가셨다.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난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헤어져 계시던 어머니를 만나 행복해하실 것이고, 먼저 가신 전우들과 함께 전쟁 이야기를 하시며 눈빛을 반짝이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5년 아버지의 삶은, 부모님 세대 대부분이 겪어야 했던, 가난과 고통과 인내의 삶이었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당연히 해야 할 숙명으로 여기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내게 그것을 갚을 기회조차 제대로 주시지 않고,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 속에서 돌아가셨다. 그것도 코로나 19에 확진이 되어서 너무나 어이없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눈물이 쏟아진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께서 코로나 19에 확진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 2월 19일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나 올지도 모를 부작용이 걱정되어 아버지께서는 백신 접종도 하지 않았기에 놀라움과 두려움은 피를 말리게 했다. 하지만 위험한 증세는 없다고 해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코로나 거점 병원에서도 특별한 증상은 없다며 곧 나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아침 아버지께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라 허둥지둥 차비를 하고 있는데, 곧 사망할 것 같아 임종을 못 볼이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그때는 오전 11시였고, 나는 서울에서 당진 가는 버스 안에 있었고, 터미널에 내려서 남편과 함께 대전 코로나 거점 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버지 임종을 못 보고 보내드린다면 내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밀려드는 초조함과 불안감에 입술이 타들어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께서 운명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12시가 넘어서자 두려움과 공포가 극도에 다다랐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였고, 다행히 면회가 된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런데 면회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복잡했다. 방호복을 입고 아버지를 만나기까지 무려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사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실까 봐 초조함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우주인 같은 방호복을 입고 격리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침대 위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산소포화도가 66까지 내려가서 임종 직전까지 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산소호흡기도 떼고 완전히 회복된 듯 보였다.

 "아버지, 미경이가 왔어요."

하고 내가 말하니까 눈을 번쩍 뜨시고

"그래, 미경이구나."

하고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남편을 보고는

"윤 서방이구나."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느냐고 여쭤보니까 온 몸이 다 아프고,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다른 사람 대신으로 여기에 누워  있다."

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코로나 감염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 치료 잘 받으시고 빨리 나아서 다시 뵈어요. "

하는 내 말에 아버지께서는 그러자고 대답을 하셨다.

 5분 가까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오면서, 나는 아버지께서 완쾌되어 퇴원하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담당과장도 사망 직전까지 갔는데 회복이 되어서 깜짝 놀랐다며 다 나아서 퇴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4시 30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를 받자 담당 간호사가 말했다. 주무시는데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고 맥박도 잡히지 않는다고.

 그  말이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심정지가 왔다는 간호사의 말이 수화기를 통해 달려왔다. 그때가 4시 40분이었다. 온몸의 기운이 남김없이 빠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남편과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당장 퇴원해도 될 정도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거짓말 같았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 안에는 침묵만 가득 차 올랐다.  남편과 나는 그렇게 당진에서 대전까지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담당 간호사가 나와서 보호자 두 명만이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감염위험으로 입관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에 감사해야 했다. 나는 전날 대화를 나누었던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빠와 남편이 방호복을 입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수의조차 입지 못하신 채 그대로 밀봉당하셨고 장례식장과 분리된 건물에 안치되었다가, 발인날 아침 그곳에서 나와 관속에 갇힌 채 우리와 마주했다. 관 위에는 <감염>이라는 빨간 글씨가 찍혀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비극>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슬픔이 몰려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내 아버지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께서 환갑 되시던 해 손수 장만하신 안동포 수의를 입고 가실 것이라고 자랑처럼 말씀하셨는데, 입혀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고집스럽게 수의가 든 가방을 들고 따라갔다.

리무진에서 관을 내리기 전에 관리인들에게 사정을 해서, 아버지의 관위에 수의를 올리고 보훈처에서 나온 대형 태극기를 덮어서 화장장으로 향했다. 태극기를 덮는 순간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음이 터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죽으면 원호청에 전화해라. 그러면 거기서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관에 태극기를 덮고 6명의 제복 입은 군인들이 와서 옮겨 줄 것이다. "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생략되었지만, 태극기라도 덮을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5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면서 제대로 못 해 드린 것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몰려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 반 만에 뼈가 되어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정말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들도 죽을 수밖에 없고 유골함에 다 차지도 못할 뼛조각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고 허망했다.

 아버지의 뼈가 담긴 유골함은 뜨거웠다. 그 뜨거움은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내게 전해주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이제 슬픔을 거두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유골함에서 스며 나온 아버지의 마지막 촉감은 내 손바닥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면서 또다시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모실 곳은 대전 국립현충원 맨 윗자리에 있는 묘터였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수많은 묘지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현원에서 미리 준비해둔 묘터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골함을 함께 묻고, 묵념을 하고 돌아오는 길은 그래도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그토록 원하시던 현충원에 어머니와 나란히 모실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 조카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그것은 빠름과 늦음의 차이일 뿐이다. 조금 더 늦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슬픔과 고통과 아쉬움의 차이는 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께서 코로나 19에 확진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입관도 할 수 없었고, 여러 가지가 생략되어 가족들이 모두들 안타까워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 같은 이 시기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망 직전까지 가셨던 아버지께서 잠깐 회복이 되어 대화까지 나눈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고 가신 마지막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못 보고 보내드리면 내가 평생을 자책하며 살까 봐, 혼신의 힘으로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잡고 나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코로나 사망자 유가족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겪는 이 현실이 슬프고, 아직도 놀라고 당황스럽다.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순간순간 미칠 듯이 화기 나기도 한다. 왜 내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왜 나는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슬퍼해도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고, 나는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절망 같이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하루빨리 코로나 팬데믹이 사라지고, 더 이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에도 봄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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