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 때면 제일 먼저 찾아보는 날이 있다. 까만 글씨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붉은 숫자들-바로 음력 설날이다. 나는 두꺼운 사인펜을 쥐고 숫자들을 모아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위로 아득한 옛날의 영상들이 신기루처럼 떠오른다.
숨 막힐 듯 꽉 짜인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우리’가 아닌 오직 '나'만 존재하고 있는 삭막한 이기 속에서도, 더없이 풍요롭고 넉넉했고 정이 넘쳐났던 그날의 추억들이 있어 나는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더없이 귀한 보석이 되어 심장 깊은 곳에 반짝이는 별로 빛난다.
산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손등이 터져 피가 날 정도로 군불 지필 나무를 찾아다니던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무리 신어도 떨어지지 않던 검정 고무신 대신 새하얀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던 날. 쫄깃쫄깃한 인절미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날. 순간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한없이 설레었고 이유도 없이 웃음이 쏟아지던 날이 바로 설날이었다.
설날이 오기 며칠 전부터 우리 가족은 집안 청소를 하였다.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찢어진 벽지는 새것으로 깨끗하게 치장을 하였다. 니스 칠이 된 마루는 마른걸레가 몇 번만 지나가도 거울처럼 반짝거렸고, 칠이 벗겨진 창틀도 페인트로 깔끔하게 단장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내 몫이 되었던 것은 남포등과 유리창 닦기였다. 나는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갖은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그것들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았다. 그러고 나면 놋그릇 닦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종손이었던 우리 집은 제기(祭器)를 비롯하여 놋그릇이 많았다. 다 내어놓으면 그리 넓지 않은 마당 안이 가득 차곤 했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언제 다 닦나 싶어서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놋그릇을 닦았다.
놋그릇 닦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와 조각을 절구에 곱게 빻아서 체에 내린 뒤, 그 가루를 물에 조금씩 으깨어 짚수세미로 닦아야 하는 그 작업은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힘에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닦았다. 아침을 먹고 시작하면 해거름 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 닦은 놋그릇을 물로 씻어 행주로 닦아 놓으면, 내 얼굴이 보일 정도로 반짝였다. 손가락 끝이 갈라졌지만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신이 났다.
놋그릇 닦는 일이 끝나면 엿을 고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슬고슬한 고두밥을 항아리에 담고, 엿기름을 붓고 아랫목에다 담요를 덮어두면 새벽 교회당 종소리에 맞추어 뚜껑이 열렸다. 비몽사몽간에 잠을 설치다 눈을 뜨면 온 집안은 달짝지근한 엿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냄새를 맡고 횟배를 앓고 있다는 동네 아저씨가 제일 먼저 찾아왔다. 맨 위에 고인 엿물을 먹으면 아픈 배가 낫는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해마다 엿물을 달이기 전에 우리 집 대문을 밀고 들어섰고, 엄마는 큰 대접에 엿물을 가득 담아 드렸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한 그릇씩 마시라고 했다. 그런 다음 엿물을 삼베 자루에 붓고 시루 위에 나무토막을 받쳐놓고 짰는데, 건더기는 엿밥이 되고 물은 가마솥 속으로 들어갔다.
말간 엿물이 뜨거운 가마솥 속에서 보글보글 끓으며 갈색으로 변하고, 조청이 되고, 엿이 되는 과정은 참으로 신기했다. 언제 엿이 되는지 가슴 두근거리며 지켜보고 있으면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어머니는 온종일 장작을 지피며 엿물을 저었고, 조청이 만들어지면 절반쯤은 그릇마다 담아놓고, 갱엿이 될 때까지 다시 저었다. 주걱에 붙은 갱엿이 입김을 불어 후~날아가면 엄마는 이제 엿을 만들어도 되겠다고 하셨다.
갱엿을 아이 주먹만 하게 만들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방의 끝과 끝에 앉아 엿 덩이를 늘이고 접기 시작했다. 어떻게 늘이고 접느냐에 따라 모양과 맛이 달라지기에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 그것을 200번 정도 반복하다 보면 짙은 검붉은 갈색의 엿 덩어리는 공기구멍을 수없이 만들면서 뽀얗고 맛있는 엿이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것을 콩가루 위에 놓고 가위로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새끼 새처럼 모여 앉아 군침을 삼키던 우리 4남매의 압 안으로 한 개씩을 넣어주셨다. 입속으로 들어오던 고소하고 달콤하던 엿 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것은 감미로운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엿 만들기가 끝나고 나면 어머니 아버지는 손수 콩을 볶고, 갈고, 쌀을 볶고, 튀기고 해서, 고아놓은 조청을 섞어 강정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예닐곱 가지의 강정들은 소쿠리마다 가득가득 채워져서 엿과 함께 다락방에 놓였다. 우리는 밤마다 쟁반 가득 그것들을 담아 먹으며 어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고 아름다운 꿈을 키웠다.
떡도 지금처럼 방앗간에 가서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손수 고두밥을 쪄서 찰떡을 만들고, 절편은 절구로 빻아 시루에 쪄서 떡메로 내리쳐서 떡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떡메를 내리치고, 어머니는 아직 모양이 나지 않은 도병(搗餠)을 한 덩어리로 모으면서 수십 번이나 손을 맞추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예쁘게 빚어진 떡은 색색의 옷으로 갈아입혀지곤 했다.
나는 요즘도 가끔씩 그때의 꿈을 꾼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던 달콤한 엿물 냄새, 사각사각 강정 자르는 소리, 떡메 내리치는 소리, 우리들의 웃음소리, 어머니의 손끝에서 요술처럼 빚어지던 각양각색의 인절미들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날이면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해도 다 웃으며 받아넘길 수가 있다.
급변하는 과학 문명시대에 살면서 모두들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갈구하며 찾아 헤매는 것은 바로 옛것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기에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서로가 서로를 믿는 아름다운 정이 있다면 더없이 향기로운 삶이 될 것이고.
추억이란 살아가면서 힘들고 외로울 때 더없이 큰 삶의 활력소가 되어 준다. 그러기에 나는 비록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그날의 풍경들을 두 번 다시 재현해 주실 수는 없지만, 그날의 기억들을 온전히 가슴속에 담은 채 살아간다. 그 추억들은 죽어가는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묘약이 된다. 그러기에 결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