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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Mar 14. 2022

생활의 향기

꽃을 보며


                    

  봄이다. 사방에서 꽃 덤불이 솟아나고 있다. 꽃불이 타오르고 있다. 꽃 덤불 속으로 들어가면 나도 꽃이 될 것 같다. 꽃불이 되어 타오를 것 같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사방을 둘러본다. 물감을 칠한 것 같은 노란 개나리,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닮은 목련, 산마다 붉게 타오르고 있는 아리따운 진달래꽃,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꽃인지 꽃이 나인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눈부신 벚꽃…. 정말 아름다운 봄이다. 심장 속으로 꽃들이 가득 흘러들어온다. 숨을 쉬면 입안에서 꽃향기가 흘러나온다.

 봄이 아름다운 건 어여쁜 꽃들 때문이라는 것을 이순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눈치를 챈 나는 아둔하기 그지없다. 봄이니까 꽃이 피고 핀 꽃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예쁜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은 더욱 눈부시게 아름답고 사람들은 희망찬 행복과 설렘을 피워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올해는 유난히 꽃들이 예뻐 보인다. 나뭇가지 속에서 움도 트지 않을 때부터 지켜보면서 꽃망울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언제쯤 꽃망울이 터질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에 꽃망울이 터져버렸다.

 나이 들수록 계절의 변화가 더욱 예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젊음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알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와 반비례된 눈부신 아름다움들이 신비스러울 만큼 애틋하게 가슴으로 안겨오게 되는 것이고.

 나는 좀 더 가까이서 꽃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들을 느끼고 싶어 꽃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눈이 시리도록 부신 벚꽃들이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벌리고 나를 맞이해준다. 꽃내음이 심장 안으로 스며든다. 실핏줄을 타고 온 몸의 세포 구석구석까지 흐른다. 심장이 거세게 뛴다.

 꽃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 본다. 내가 꽃인지 꽃이 나인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꽃이 되어 있다. 얼굴 위에도 모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작은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촘촘히 꽃을 피워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꽃 덤불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시려서 차마 다 뜨지 못한다. 실눈으로 간신히 꽃잎들을 만져본다. 가지를 조심스레 흔들어 본다. 금방이라도 눈송이처럼 좌르르 쏟아질 것 같던 꽃잎들은 가지를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다. 아직은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도리질을 친다. 그 마음이 애처로워 돌아선다. 하지만 발길은 기어이 꽃잎을 따라고 유혹한다.

 '어찌할까'

 망설이는 마음과는 달리 어느새 손가락은 가지 위로 달려 올라가 꽃 한 송이를 잡는다. 아기 손톱만큼이나 앙증스러운 꽃잎 다섯 장이 침입자의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떨고 있다. 애써 모른 척 꽃잎 한 장을 따서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나직이 뇌어 본다.

“꽃 사세~요~! 꽃 사세~요~!”

 하늘 위로 날려진 꽃잎은 작은 몸을 팔랑이며 사뿐히 날아 자신이 숨 쉬던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다. 나는 또 하나의 꽃잎을 따서 머리 위로 날려 보낸다. 아니 축복처럼 내리고 있는 봄 햇살 위로 뿌려 준다.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장미꽃을 사세요…”

  나는 어느새 꽃바구니를 든 열두 살 어린 소녀가 된다.

 요즈음에는 널린 것이 아이들의 놀잇감이지만, 70년 대 초 시골 아이들의 놀이 방법이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그리고 공기놀이, 줄넘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골아이들 나름대로 재미나는 놀이 방법이 있었고 그것을 즐기기 위해 명절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요즘 아이들이 세뱃돈이나 용돈 타는 재미로 명절을 기다리듯 말이다.

 평소에는 학교 가고 집안일 거드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설날이나 정월대보름, 추석 같은 명절이 가까워 오면 한 달 전부터 저녁마다 모여서 놀이 준비를 했다. 무용, 노래, 구연동화, 연극 등 각종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발표하는 우리들만의 작은 예술제였다. 거기서 나는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주인공이 되었다.

 학교에서 하는 학예발표회 때는 부끄러워서 연극에 참가해 본 적이 없었던 나였지만 명절만 되면 어깨춤이 들썩이도록 신이 났다.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고 꾸민 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경꾼들도 어른들이 아닌 동네 언니 친구 동생들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라든가 긴장감 같은 것도 전혀 생겨나지 않았다. 친구들도 동네 언니들도 내가 꾸민 연극은 모두 좋아하고 즐겁게 구경했고, 밤이 새는 줄 모르고 공연을 했다.

  연습하면서 내용도 모두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명절날이 되면 작은 무대를 꾸미고 커튼으로 장막을 치고 엄마의 치마저고리를 빌려서 치르는 연극은 정말 신이 나고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중에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역이 바로 꽃 파는 소녀였다. 여러 동화 속 주인공들의 삶을 종합해서 만든 최초 작품인 꽃 파는 소녀는 이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나만의 걸작품(?)이다.

 어느 시골의 한 소녀가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들과 꽃을 팔면서 어렵게 살아가지만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꽃처럼 향기로운 꿈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때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면서 누구나의 사랑을 받았는데 어느 날 잘 생긴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줄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고 뻔한 내용이지만 그때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라도 되는 듯 흥분했다. 그 연극을 할 때는 모두가 가슴 조이며 눈물을 지었다.

 막이 열리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녀는 색종이를 잘게 잘라서 만든 오색 종이가루를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왼쪽 팔에다 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걸으면서 오른손으로 꽃가루를 한 주먹씩 뿌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장미꽃을 사세요. 향기롭고 부드러운 장미꽃을 사세요.”

 열두 살의 어린 소녀는 그렇게 꿈을 먹고 자라 이제는 환갑이 넘다. 그렇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때 간직했던 꿈들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 얼음왕국 만화영화를 보며 눈물짓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언제나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이 뛴다. 더욱이 곳곳에 향기로운 꽃불이 타오르는 봄이 되면 언제나 꽃 파는 소녀가 되어 설레는 꿈을 꾼다. 봄 햇살보다도 고운 그리움을 피워 올린다.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더없이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 햇살이 눈부시다.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햇살 탓인가, 그리움 탓인가.

 봄이 되면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이라는 열병.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가고 싶을 만큼 가슴이 저려오는 이유 없는 이 열병을 나는 사랑한다. 습기 차고 암울했던 유년의 골짜기에서 꽃 파는 소녀가 되어 작은 희망을 길어 올렸던 시간들을 사랑한다. 죽음을 꿈꾸었던 사춘기도, 삶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이삼십 대도,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며 헤어날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렸던 가슴 저린 40대도 나는 사랑한다. 버리지 못한 꿈을 형벌처럼 껴안고 살아왔던 오십 대도, 담담하게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이 육십 대도 나는 눈물겹도록 사랑한다.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잊지 않고 찾아오는 꽃덤불 가득한 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매서운 칼바람을 기어이 이겨내고 여리디 여린 꽃잎들을 기어이 피어올리고 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봄꽃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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