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벤자민 화분 하나가 거실 안에서 반짝이는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웬 화분이냐며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나를 향해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혜 엄마가 보냈어. 당신 생일인 거 아나 보지?"
순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제는 축전으로 생일을 기쁨으로 장식해주더니 오늘은 향기 고운 벤자민으로 행복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모든 바쁜 일을 접어두고 그녀에게 전화부터 했다.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루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화분을 샀어. 벤자민 향내를 맡으면 건강이 좋아진대. 빨리 나아 함께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자."
햇살보다 화사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그녀를 잊었을 만치 무관심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를 알고 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생일을 맞았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겨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쩌다 한 번씩 그녀의 생일을 기억해내곤 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아예 날짜까지 잊어버렸다.
나보다 한 달쯤 빨랐는지 늦던지 했는데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똑같은 날 서로에게 이야기한 것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는데 왜 나는 기억을 못 할까. 그렇다고 생일이 언제냐고 다시 물어볼 수도 없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많은 세월들이 켜를 쌓아버렸다.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잠든 조용한 밤에 나는 그녀의 집 창문 밖으로 스며 나오는 불빛을 바라본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이사 오기 전에는 같은 동에 살아서 집안에서는 그녀의 집은 볼 수가 없었다.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 별을 가슴에 안고 고개를 들면 그녀가 거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것이 좋아 밤공기 속에서 오래오래 서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사를 온 후로는 그녀의 집이 어디쯤인지 아예 잊고 살았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마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너의 집 창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얼마나 그녀에게 무관심한 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정말 부끄러웠다. 아무리 일이 바쁘다고 하여도, 생활에 쫓겨 여유가 없다 해도 한 번쯤 마주 앉아 차 향내 속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엮어 올릴 수는 있었을 터인데.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되었다.
불 꺼진 그녀의 집 창문을 바라보며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을 떠올려 본다.
결혼 후 친구도 없었던 나는 따뜻한 사랑에 늘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와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부터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도 같은 데다 햇살같이 밝은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믿음으로 다져진 평화스러움은 나에게 많은 설렘을 주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위해 소녀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첫 단편을 쓴 것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보면 너무나도 엉터리인 그 소설들을 그녀는 싫증 내지 않고 읽어주었고 아낌없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나의 모난 성격에 비해 그녀는 한 떨기 난처럼 고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그녀마저 불행해질 것이라는 나 혼자만의 판단이 그녀에게 가려는 내 마음을 애써 가로막았다. 그래도 그녀는 날 잊지 않았다.
생일 때나 명절 때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언제나 마음을 챙겨 보내주었다. 동네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눈부신 햇살 닮은 미소를 보내주었다. 이유모를 염세주의에 빠져 우울해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수채화처럼 맑고 밝은 빛으로 나에게 다가오곤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나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스로 멀어지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가족 외에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생일날 아침에 축전을 보내고 향기 나는 벤자민 나무를 보내준 그녀 앞에서 나는 참았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밤새 고민하고 선물을 골랐을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지금껏 나의 무관심 죄를 속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 나도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내 마음의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있는 나를 향해 남편이 실반지를 하라고 했다. 실반지는 의미 있는 선물이니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실반지를 선물로 정해놓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어 가슴이 설레었다.
환한 보름달이 넉넉한 미소를 보내주는 밤, 실반지는 들고 그녀에게로 향하는 가슴이 소녀처럼 설레었다. 그녀는 이 선물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소녀처럼 기쁨의 비명을 지를까. 말없이 눈부시게 웃기만 할까. 하늘의 별빛도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어깨 위로 기어이 행복의 비명을 좌르륵 쏟아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