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미경 Jan 11. 2022

생활의 향기

살아있음의 신호


                              

 고구마를 사다 놨는데 그만 싹이 났다. 구워 먹어야지 하고 베란다에 놓아두고는 잊어버린 것이다. 먹으려고 보니 싹이 너무 많이 났고, 버리려니 아까웠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유리컵에 물을 붓고 넣은 뒤,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고 있다. 새파란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올라오고 있다. 밤새 누군가가 마술이라도 부린 것 같다.

 볼수록 신기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마나 자랐을까 확인하며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작은 고구마 줄기 하나에도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사철 변함이 없는 답답한 아파트 안에, 날마다 파란 잎을 피워 올리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 삶에 더 없는 윤활유를 주고 생기를 일으키게 만든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면서 정면으로 보이는 고구마 줄기에 가장 먼저 관심을 던진다. 볼 때마다 잎들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물만 먹고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을까?”

 나도 한 마디 거드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람들도 물만 먹고 한 달 이상은 살 수 있어요.”

 고구마 줄기도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 듯 앙증스럽게 쑥쑥 잘도 자라나 준다. 눈빛을 반짝이며 온 몸으로 행복을 피워 올린다. 그것으로 인해 남편과 대화의 창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무척 기분 좋다. 그런 기쁨을 준 고구마 줄기가 더없이 기특하여 나는 눈길이 갈 때마다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오래오래 살아서 기쁨과 행복을 많이 많이 달라고. 집안 가득 즐거움이 넘치게 해 달라고.

 화초가 잘 되는 집은 집안이 번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화초를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좋은 화초가 우리 집에 들어와도 얼마 못 가서 그 생명을 다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장에만 가면 꽃집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작은 것 하나라도 사서 집안에 들여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봄에는 철쭉을 비롯한 예쁜 꽃나무로 집안을 채우고, 여름엔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한 각종 소품들로 싱그럽게 장식했다. 그리고 가을엔 소국으로 집안에 향기를 가득 채우기도 했으며, 겨울에는 붉은 동백나무가 붉디붉은 꽃송이들을 피워내어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설레며 바라보곤 했다.

 바이올렛을 색깔마다 골라 베란다에 늘어놓은 적도 많았고, 선물로 들어온 서양 란과 여러 화분들로 인해 한 때 우리 집이 꽃집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생일 선물로 받은 벤자민과 이사하면서 산 고무나무와 열대산 나무들도 우리 집 가족이 되어 한동안 머물렀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숨 쉬기를 멈춰 버렸다. 우리 집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는지, 내가 보기 싫었는지 몇 달 견뎌 내는 것도 힘들어했다.

 물 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탓도 있지만,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관리도 소홀히 한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죽은 화분들이 남기고 간 꽃병만 해도 리어카로 가득할 정도였으니, 화분 사는 것이 병적일 정도였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화분을 사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꽃집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차를 타고 가다가도 꽃집이 보이면 들어가서 한 개라도 사 오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화초들의 수난이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마 줄기는 나도 화초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이제야 우리 가정에도 평화가 오고 있는 것일까. 화초가 잘 자라지 않는 집은 집안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버리는 화초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던 지난날들. 그 속에서 어쩌면 나는 암울한 내 삶을 단정 지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맥없이 목숨을 놓아버리는 수많은 화초들처럼 내 삶 또한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날마다 푸른 물을 머금고 줄기를 만들고 잎들을 피워내는 고구마 줄기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가진다.

 주인에게 잊힌 채 베란다에서 외롭고 힘들게 삶의 끈을 놓지 못 한 채 버티었을 고구마. 얼마나 삶이 간절했으면 싹을 다 틔웠을까. 그리고 이처럼 쑥쑥 잘 자라줄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을 고구마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미안하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신호를 보낸다. 어떤 방법이 로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려 한다. 슬프고 외롭다고 말하려고 한다.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누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삶이 급급해서 주위를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 가지려 하지 않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힘든다는 이유로 마음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을 고구마가 일깨워 주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에 대해 알려주었다.

 생명이란 참으로 소중하고 신비롭다. 풀잎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무심히 가꾼 고구마 줄기가 이토록이나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던가. 나 또한 내 운명을 내 생각 하나로 바꿔 버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모두가 나 스스로 만든 굴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실을 바로 보고, 그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을 작은 고구마 줄기도 알아듣고 열심히 싹을 틔우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고구마 줄기뿐 아니라 얼마 전에 사 온 러브체인과 선물 받은 행운목도 다투어 무성한 잎들을 피워내고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 가슴속에도 작은 희망 같은 것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이전 09화 생활의 향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