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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Sep 08. 2021

능소화 필 무렵

    작년에 용기백배해서 시작한 글인데 지지부진합니다. 가자니 힘이 부치고 끊자니 그나마 쓴 글이 - 글 씩이나 - 아쉽고...  써놓은 것 조금 손을 보고, 어떻게든 이어서 마무리를 해보려 합니다. 이것 역시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고~고~

   

   먼 곳에서의 자동차 소음처럼 웅웅대던 소리가 차츰 또렷해졌다. 킥킥, 호호 웃음소리가 중간 중간 섞였다. 

   - 저건 현택이.

   - 영상이네. 얘는 지연이고.

   - 별로 재미있는 얘기도 아니구만 뭐 저렇게... 그나저나 쪽팔려 죽겠네.

   - 형은이는 갔나?

   이미 잠은 달아났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아직은 서먹한 과 동기들이랑 어울린 술자리였다. 난생 처음 마시는 소주. 게다가 동기 여자애들도 함께. 더욱이 형은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자타공인 숙맥인 그였다. 무심한 척 곁눈질로 그녀를 훔쳤다. 실수로 눈이 잠깐 마주치면 공연히 얼굴이 벌게졌다. 들킨 것 같은 어색함을 숨기려 겁도 없이 ‘두꺼비’ 몇 잔을 연거푸 털어 넣었다. 팽그르르... 술상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더니 벽에 붙은 메뉴판이 자전과 공전을 거듭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던 끝에 그 자리에서 뒤로 벌러덩, 잠이 들어버렸던 거였다.

   - 어떡하지? 모른 체하고 일어날까? 자리 끝날 때까지 계속 자는 척 할까?

   “어~ 석호 깨나보다.” 

   우현이였다.

   “석호야! 일어나! 학교가야지! 큭큭...”

   - 그래. 고맙다 우현이 이 자식... 두고 보자. 내 반드시...

   “으으읔!” 

   부러 과장되게 기지개를 켜며 석호는 일어나 앉았다.

   “미안해. 오늘 내가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보다. 원래 이러지 않는데.”

   “그럼 그럼. 그러니 그렇게 쌔근쌔근 잘 자지. 다음에 좋은 컨디션 꼭 보여주라. 큭큭...”

   - 으~ 우현이 이 시키. 두고 보자. 내가 나중에 너를 꼭...

   소주집을 나온 그들은 2차로 생맥주를 마시러 갔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 석호는 안 좋은 컨디션을 ‘증명’해야 했기에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형은이를 어떻게 보지? 술도 못 먹고 말도 못하는 멍청이로 찍혔을 거야. 젠장. 첫 인상이 승패를 가른다고 했는데... 아까 뻗었을 때 새끼들이 나 엄청 씹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거야. 약육강식, 경쟁자는 마땅히 도태시켜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의리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새끼들. 아아앜! 어쩌지? 어떡하냐구!’

   ‘아니야! 형은이는 착하고 똑똑한 애잖아. 걔 눈을 봐. 그렇게 눈빛이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진심을 딱~ 알아챈다고 했어. 형은이는 나의 순진함을 알았을 거야. 자기 앞에서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이해해 줄 거야. 착한 형은이! 고맙다 형은아!’

   “븅신~ 뭐가 고맙냐? 아주 쇼를 해요, 쇼를...”

   언제 왔는지 우현이 석호의 뒤에 서있었다. 

   “야. 너 형은이 좋아하냐? 그렇게 좋으면 아까 얘길하지 길거리에서 구시렁구시렁 뭐하냐? 아주 쇼를 해요, 쇼를.”

   “어? 들렸어? 역시 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게 맞네. 근데 여기서 뭐해?”

   “컨디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허세부리는 게 불쌍해서 데리러 왔지. 가자.”

   “안 돼. 오늘은 쪽팔려서... 그냥 나 오늘 컨디션 안 좋다고 해줘.”

   “답답하다, 답답해. 알았어. 근데 석호야! 너 성문종합영어 명사편의 그 유명한 격언, The Brave... 거 있잖아. 용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이거 몰라? 일단 대시를 해야지 메이드가 되는 거라고.”

   “지행불일치라고! 안 되는데, 못 하는데 어쩌냐.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걔 보면 눈앞이 아득해지는데.”

   “답답하다, 답답해. 야! 그냥 딱~ ‘형은아 니가 자꾸 내 눈 안에 들어온다. 우리 사귀자!’ 이러면 여자애들은 그 박력에 일단 마음이 쏠리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한 다음에 한 발 한 발 작전 짜서 가는 거고. 그러다 인마! 손도 잡게 되는 거고 또...”

   “아~ 듣기 싫어. 너 잘났으니까 가서 히히덕거리며 맥주나 마셔. 나 컨디션 안 좋다는 말 잊지 말고.”

   “알았다. 븅~ 일단 내일 나한테 수업 좀 듣자. 형이 아주 잘 가르쳐 줄게. 형 말대로 했는데 안 되면 이 형이 열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장을. 아~ 답답하다, 답답해. 들어가. 가면서 궁시렁 거리지 말고! 울지 말고!”




   “어떻게 됐어? 잘 했냐?”

   “뭐래? 사귀어 준대? 싫대?”

   “...”

   “까였네, 까였어. 저거 저거 얼굴 함 봐라. 답답하다, 답답해. 자~ 소주나 한 잔해라.”

   담배 연기와 부침개 냄새가 뒤섞여 온통 기름기에 절여진 듯 눅눅한 공기로 가득찬 ‘길모퉁이 카페’ 한 가운데 자리에서 우현과 현택은 막 소주 한 병을 더 시켜서 따르던 중이었다. 테이블 네 개와 비틀거리는 간이 의자를 놓기에도 비좁아서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다른 테이블 손님의 어깨에다 대고 ‘잠깐만요’해야 하는 동굴같은 선술집. 그 동굴을 가득 채운 열 서넛의 호모사피엔스들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후렴 ‘뚱당뚱당 뚱당뚱당 뚱 하~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를 고래고래 합창하고 있었다. 

   우현과 현택은 석호가 들어서자 궁금 반, 그럴 줄 알았다 반 정도의 표정으로 능글거리며 그를 맞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연애사는 극적이고 다른 이의 연애 이야기는 기름진 안주거리인 법. 석호의 입에서 흘러나올 오늘의 모험담에 대한 기대로 그들의 눈은 부지런하게, 좀체 볼 수 없던 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없어졌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형은이가 버스에서 내리길래 따라 내렸는데 없어졌다고.”

   “또야? 아니 이번이 몇 번째냐? 또 숙대 앞이었어?”


   지난 번 석호가 곯아떨어졌던 그 술자리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우현과 석호는 형은에게 다가서기 위한 나름대로 치밀 - 하다고 자기들끼리만 여기는 - 한 작전을 세우고 대사를 연습했다. 작전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어설펐지만 자칭 연애전문가라는 우현의 장담을 석호는 믿어보기로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어색한 대사와 과장된 몸짓, 무엇보다도 석호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우현의 '여성 심리 공략법' 열강이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맴도는 다방과, 두부부침을 놓고 마주 앉은 대폿집과, 빈 강의실들에서 이어졌다. 때때로 ‘우현이 이 녀석 나를 갖고 지 꺼 연애 연습하는 거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우현의 말대로라면 형은은 곧 석호와 사귀게 되어 있는 운명이었다. 우현이 장을 지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봐! 일단 형은이가 수업 끝나고 혼자 버스를 탈 때를 노려. 너도 그 차를 타고 멀찍이 거리를 두란 말이야. 눈치 채지 못하게. 하지만, 이게 포인트야. 형은이는 네가 그 버스를 따라서 탄 걸 알고 있다고. 모르는 척 하지만. 그 심리를 이용해서 걔 자존심을 띄워 주고 니가 접근할 거라는 기대감을 높여주는 거지. 

   그러나 우리가 누구냐? 말을 걸지 않는 거야. 이걸 두 번 하는 거야! 왜 두 번이냐고? 답답하다 답답해! 야! 우리 민족은 삼세판의 민족이잖아. 세 번째에 바로 대시하는 거라고. 그럼 어떻게 되겠어? 형은이는 그 동안 자신의 기대 혹은 예상이 틀어진 것에 대해 좀 기분이 나빠졌겠지? 그러면서 일종의 오기 같은 게 생겼을 거거든.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때 니가 딱~ 어프로치하는 거지. 어~ 형은이 너도 이 버스 타나보구나~ 이렇게. 세상 참 넓고도 좁다더니~ 이렇게. 우리 요 다음번에 또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면 비엔나커피나 한 잔 하러 갈래? 이렇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형은이는 자기 자존심도 좀 회복되고, 자신이 품고 있던 어떤 기대의 실체도 깨닫게 되고, 우연한 만남에 대한 희망도 품게 되고, 그럼 어떻게 되겠어? 너랑 형은이는 바로 C.C 등록 완료라 이 말이야. 

   이게 바로 80년대를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리 공략을 통한 실전 연애 성공법이라구.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이론을 정확히 적용한 아주 과학적인 방법인 거지. 안되면 내가 장을 지진다, 열 손가락 다!”     


   ‘무슨 파블로프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하면서도 석호는 설레는 마음으로 형은을 따라 버스를 탔고, 여섯 번이나, 그녀의 상한 자존심이나 숨겨진 기대 따위는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매번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놓쳤으며, 여섯 번이나, 그러는 사이 6월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장 안 지져진 우현의 손가락은 여전히 튼튼했다.

   “나 이제 그만 할란다.”

   소주 한 잔에 얼굴을 찡그리며 석호는 내뱉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고도 쓴맛이 이상한데 그럼에도 사뭇 마셔버릴 기분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둥, 고지가 바로 저기라는 둥 친구들의 너스레는 이명처럼 웅웅거릴 뿐이었다.

   석호는 벽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디자인의 ‘멸공통일’ 이라는 글씨가 어지럽게 프린트된 교련복을 입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스무 살  또래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밝음과 꼿꼿함, 새롭게 맞닥뜨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넘어서버릴 호기심, 혹은 서투른 수컷의 과장된 치기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보잘 것 없음’과 ‘한심함’이 거기 있었다. 한 시간 전 남영동 버스 정류장에서 쇼윈도우에 비춰 보였던 그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대체 뭐하는 거지?’하면서도 미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는커녕 우물쭈물 그 곳에 있을 뿐인 스무살의 아이. 진지함으로 가장한 욕망과 순진함으로 겉칠한 우유부단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신입생의 첫 번째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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