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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Sep 13. 2021

능소화 필 무렵 - 2

 작년에 용기백배해서 시작한 글인데 지지부진합니다. 가자니 힘이 부치고 끊자니 그나마 쓴 글이 - 글 씩이나 - 아쉽고...  써놓은 것 조금 손을 보고, 어떻게든 이어서 마무리를 해보려 합니다. 이것 역시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고~고~


   오늘도 학교 정문에서는 데모가 벌어졌다. 

   일상이 되어버린 매캐한 최루가스와 보도블록 파편의 대치. 해산하라는 전경대의 확성기 소리와 그에 맞서는 학생들의 구호 소리. 현장 채증을 피하기 위해 교련복을 입고 데모대에 나선 학생들 틈에서 석호도 구호를 외치고 스크럼을 짜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허식이었다. 그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현장 증명으로 스스로에게 ‘의식있는 놈’의 라벨을 붙이며 만족했다. 그가 자신에게 더욱 짜증스러웠던 대목은 형은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방편으로써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오늘 하루를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채 빙충맞게 보내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 지난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그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옥죄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재미도 없었다.

   “나 진짜 그만할래. 그냥 동기로 자연스럽게 지내면 되지 뭐. 내 인연이 아닌가부다 하하하. 놀만큼 놀았으니 군대 가기 전에 공부나 한번 해보자.”

   석호는 짐짓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 속에는 그녀를 못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감춰져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기에, 처음으로 그를 알 길 없는 설렘으로 달뜨게 만든 존재였기에. 어설프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간 그 길로 그녀와의 모든 연결점이 마침표가 되리라는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래. 이러는 게 맞아. 내 주제에 여자 친구는 무슨. 잘 생각했어!”

   꽤나 마신 술로 발이 무거웠지만 머릿속은 외려 또렷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후문으로 올라가는 길옆의 붉은 벽돌 양옥집 긴 담장에 연녹색 넝쿨잎이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흰색 달빛이 쏟아지는 넝쿨 사이로 어린아이 주먹만한 주황색 꽃망울들이 달려있었고 그 위쪽에 깔때기처럼 생긴 황적색 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활짝 핀 그 꽃이 몹시 처연하게 보였다.     




  그 애를 처음 본 것은 입학 면접시험 때였다. 물론 면접시험이야 복수 지원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시험은 시험이었다. 대기실로 배정된 도서관 건물 2층의 강의실은 조용했다. 나를 포함한 수험생들은 안 보는 체하면서 주위의, 경쟁자인 다른 아이들을 흘낏거리거나, 뭔가를 노트에 끄적거리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스포츠 신문을 보는 친구도 있었는데 참 대범하다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대구가 고향임에 분명해 보이는 세 녀석이 억양 심한 사투리로 과장된 이야기와 과장된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자식들, 허세 떨고 있구만. 그래도 친구들과 용케 같은 데를 지원했네.’

   그 애는 내 왼편 세 줄 정도 앞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작은 어깨, 그 어깨를 덮은 긴 생머리.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귀 뒤로 넘긴 머리칼 덕분에 갸름해 보이는 볼과 턱선이 또렷했다. 신기했다. 창문을 통과한 햇살에 뽀얀 볼의 솜털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교차하는 남방에 청바지, 빨간 줄이 그려진 흰색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더플코트를 책상 위에 단정하게 개켜 얹어놓았다.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표시일까? 작은 스프링 노트에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나?

   “니 뭐 그리나? 한 번 보여도.”

   대구 세 녀석 중 키가 제일 크고 왠지 느끼해 보이는 녀석이 그 애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저런 매너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응. 그냥.”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런데 엄청나게 또렷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 애가 대답을 했다. 그 애의 목소리에 실린 아주 작은 웃음기로 강의실 안이 찰랑거렸다.

   “니 붙을 거 같나?”

   저런 미친 놈...

   “붙었으면 좋겠어. 나 열심히 했거든. 그리고 운도 좀 따르는 편이라서.”

   아, 저렇게 무례하게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해주다니...

   “나도 붙을끼닝께, 그라믄 난중에 사귀자. 니 맘에 든다 아이가.”

   미친 놈.

   “그래. 꼭 붙어. 그런데 난 너랑 안 어울리는 거 같아. 그리고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과 커플은 안좋다더라.”

   와우!

   “신형은 학생, 나오세요!”

   그 애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었다.     


   입학식을 했고 어찌어찌 수강신청을 했고, 교재를 받고 대학 생활 안내를 받고 여기 저기 강의실을 찾아다녔다. ‘음. 이것이 고삘이 때와는 확실히 다른 대학 생활이군.’ 왜인지 어색하고 불편해서 개강 첫 주는 학교를 빠졌다. 

   그리고 맞은 첫 번째 교양국어 시간. 계열로 뽑힌 우리는 3개의 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들었다. 나는 B반, 이름 순으로 반 편성을 해서 우리 반은 ‘박’의 후반부터 ‘ㅇ’의 성씨까지로 구성되었다. 김 씨 정말 많다.

   “너 이숙영이지? 나는 수원에서 온 박현준이라고 해. 우리 잘 지내보자.”

   베이지색 잠바 차림에 뽀얗고 어려 보이는 한 남자애가 여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 강의실 한 편으로 가더니 큰 소리로 얘기했다. 일동 집중.

   “그래, 나는 전주에서 온 이숙영이야. 친하게 지내자. 그런데 너 제법 용기있다.”

   동글동글하고 하얀 얼굴의 숙영이가 온 얼굴에 웃음을 피우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어? 어!”

   하하하하. 강의실 안에 웃음이 번지고 우리의 용기백배 현준이는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박형준과 서둘러 강의실을 나갔다. (물론 그 둘은 그 뒤 친하게 지냈다)

   그 한 무리의 여학생들 사이에 그 애가 있었다. 뽀얀 햇살에 뺨 가득 뽀송뽀송한 솜털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듯한데, 긴 생머리는 오른 쪽 귀로 걸쳐져 있고 이마를 덮은 앞 머리카락 아래로 짙은 눈썹에 쌍꺼풀이 없는 큰 눈이 별처럼 초롱거리고 있었다. 대낮인데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게 웃는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가지런했다. 160센티쯤 보이는 작은 키, 면접시험 날 봤던 작은 어깨, 흰색 프로스펙스 운동화 차림에 책 몇 권을 품에 안고, 그 애는 거기서 웃었다. 햇빛이 온통 그 애 이마 앞에서 반짝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숙영아. 너 짓궂어.”

   대기실에서 들었던, 강의실을 온통 찰랑거리게 만드는 작은 웃음기를 머금은 작고 또렷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밀려들었다. 

   신.형.은. 

   사랑하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마음을 접기로 결심하고 나니 외려 담담하고 편해졌다, 적어도 겉으로는. 첫 번째 술자리 이후 석호가 낀 몇몇 남학생 무리와 형은을 비롯한 여학생 그룹은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몇 차례의 술자리가 이어졌고, 조를 짜서 과제도 진행했으며 반 전체 야유회도 다녀왔다. 그때마다 석호는 의식적으로 형은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때마다 그 둘은 같은 조 혹은 같은 그룹으로 섞이곤 했다. 우현을 비롯한 친구들은 부지런히 석호를 놀리고 부추겨 댔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언제 그런 연정을 품은 적이 있었냐는 듯 그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친하게 적당히 사무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렸다. 

   다만, 개인적인 일로 형은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일도 만들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다들 웃을 때 석호는 살짝 미소만을 띠었고, 철저히 맞은편에 앉았으며 다 같이 걸어갈 때에는 늘 몇 발짝 앞서거나 뒤에 섰다. 그녀가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있을 때면 주위의 친구들을 툭 쳤다. 짜식아, 매너 좀 있어라, 하며. 이대로 몇 개월만 보내면 무사히 한 학년을 마칠 것이고, 계획대로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면 홀로 마음 설렜던 일들은 자연스레 풋내 나는 기억 속으로 잠길 것이었다.

   가끔씩, 자신도 모르는 새 석호는 책을 읽거나 과제를 발표하는 형은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는 제 모습을 서둘러 수습했다. 어쩌다 그녀와 나란히 걷거나 앉게 되면 허리께부터 어깨 뒤쪽까지 뻣뻣해지는 근육을 풀고자 짐짓 목을 돌리고 어깨를 휘휘 젓곤 했다. 그의 숨소리를 그녀가 들을까 가슴으로만 숨을 들이키다가 고개를 돌리고 가쁜 숨을 몰아내기도 했다. 

   몇 번인가, 술자리를 마치고 홀로 집으로 향하는 밤길에 석호는 아주 작은 소리로 “형은아”라고 발음해 보았다. 왠지 불손한 죄를 지은 것 같았고 관자놀이 부근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싫었다. 누가 들을까 숨 쉬듯 ‘씨발’ 하고는 잊었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꼭꼭 안으로 안으로 접어 넣었다. 스무 살의 마른 몸 어디에 그렇게 깊은 구덩이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울리며 보니 그는 자신과 형은이 닮은 점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을 종종 걸렀고, 바나나우유보다 흰우유를 더 좋아했다. 강의실 출입문 앞의 똑같은 책상 모서리에 한 번씩 부딪히곤 했으며, 어떤 날은 둘 다 부딪힌 탓에 서로서로 오른쪽 허벅지와 엉덩이의 접히는 부분을 문지르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탕수육은 소스를 찍어먹었고, 양념치킨보다 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땐 늘 가위부터 냈고 승률이 좋지 않았다. 사다리를 타면 늘 제일 큰 벌칙에 걸리는 것도 거의 그들 둘이었다. 크게 웃는 것을 잘 못했는데, 그녀의 작은 웃음은 크게 찰랑거리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정말 부끄러운 웃음과 달랐다. 코카콜라보다 펩시콜라를 좋아했고 짜장면에는 고춧가루를 넣어 비벼야 했다.

   형은은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뜻밖에 장난기가 있었고 이상하게 석호에게는 승부욕이 발동해서 이길 때까지 승부를 냈다. 그래서 석호는 매번 져주었다. 신나하는 형은을 보면 잘했다 싶었다. 강촌유원지로 그 무리들이 야유회를 갔던 날, 형은이 콜라라며 건넨 종이컵 속에 들어있던 검은 액체가 간장인 줄 알면서도 석호는 모르는 척 원샷을 했다. 수건돌리기를 할 때 술래인 형은이 자신의 뒤에 놓고 간 손수건을 둔한 듯 늦게 발견한 척 했다. 

   야무지고 꼼꼼한 형은이었지만 발표를 할 때나 이야기를 할 때의 완벽함과 달리 허술한 부분도 많았다. 음료수 병을 딸 때면 탄산 거품이 튀기 일쑤였고 포크로 야무지게 찍은 떡볶이가 입에 닿기 전에 자유낙하 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제 발에 곧잘 걸려 넘어지는 형은을 몰래 지켜보던 석호가 후다닥 부축해 준 것은 몇 번이었을까.

  석호의 가방 안에는 형광펜도 두 개 이상, 삼색 볼펜도 두 개 이상씩 있었다. 빈 대학노트 한 권도. 깜빡 빠뜨리고 와서 강의 시간에 어리둥절해 하던 형은 앞에 무심한 듯 내미는 석호의 모습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간혹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석호의 남자 동기들은 집요하게 추궁하고 얼러댔지만 석호는 형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런 농담에 불편해하면 안되었다. 한번은 그를 놀려대는 동기의 말에 그 애가 맞장구를 친 적이 있었다.

   “어머. 그럼 석호가 나한테 흑심을 품고 있었던 거야? 야, 그럼 고백해봐. 그 대신 멋지게!”

   웃으며 장난치는 그녀와 친구들 앞에서 석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고 싶은데 그럴 맘이 없다!”     

   그날 밤, 석호는 역시 친구들과 길모퉁이 카페에서 한 잔씩을 하고 헤어졌다. 

   ‘고백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할 수 없었어. 지금은 더욱 할 수 없어. 그랬다가는 내가 네 옆에 지금처럼 서있지 못 하게 될 거야. 아니, 영원히. 지금 이 대로면 충분해. 

   나는 뭐랄까, 잔뜩 속으로 곪은 종기 같은 거거든. 땡땡 뭉쳐 아프고, 한 번 터지면 감출 수 없지. 쉽게 아물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아픔을 기꺼이 감내할 만큼 보람이 있는 것도 아닌.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최대한 혼자 표시나지 않게 짜내고 아물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러는 동안 너를 볼 수 있어. 나는 말야, 그거면 돼. 그러니까 너를 혼자 조용히 좋아하면 돼, 나는.

   좋아한다. 형은아.’     

   혼잣말을 웅얼웅얼 하고 나니 밤은 슬픈 듯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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