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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Mar 27. 2022

당신의 또렷한 봄은 몇 번째세요?..

    새벽에 일어나 다림질을 했습니다. 오늘 입을 흰색 드레스 셔츠와 이번 주, 다음 주에 걸치고 다닐 회색과 진회색, 검정색의 캐주얼 셔츠를. 바지에 주름을 잡고 나니 이것도 제법 노동이라고 몸이 뻣뻣했습니다. 반바지 차림으로 베란다에 나가 쭈욱 기지개를 켰습니다. 무릎을 몇 번 구부렸다 폈다, 허리에 손을 짚고 목 운동을 했습니다. 고개를한 바퀴 돌리고 앞으로 숙이고 뒤로 젖히고. 저도 모르게 끙 소리를 내다가 하늘을 올려 보았습니다. 

    먼지로 뿌연데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제와, 그제와는 다른 하늘입니다. 포근해 보였다고 적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기도 한결 보드라웠습니다. 쌀쌀한 기운이 있지만 따사로운 쌀쌀함, 이 형용모순의 단어로 오늘 새벽의 공기를 표현해도 그리 흉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같은 섭씨 6도라도 12월의 섭씨 6도와 3월의 그것은 분명 다르지 않나요?


    12시 20분 용산에서 KTX를 탔습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목포행입니다. 이별의 말도 없이 잘 있거라 하며 가는 것은 아니지만 바쁘게 허겁지겁 다녀와야 할 여정입니다. 자리를 찾아 앉아 커피를 두 모금 마시고 그냥 멍하니 있었습니다. 기차가 슬쩍 미끄러지며 출발했습니다. 한강 철교를 지나는데 창 밖 교각 아래로 보이는 진녹색의 강물은 도도합니다. 그런데 사납지가 않습니다.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따사롭고 물결에 부딪쳐 파편으로 흩어지는 햇살이 너무 반짝여서일까요? 


    어제 오후에는 2022년의 첫 번째 라이딩을 했습니다. 한강의 바람은 제 얼굴을 마치 희롱이라도 하듯 어르고 때리고 구슬렀습니다. 그 변덕이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길 옆의 나뭇가지들에는 아주 작고 희미한 연두색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작년까지 폐쇄되어 있던 농구코트에는 공 튀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강변을 따라 걷거나 뛰었습니다, 아주 뜨문뜨문 보이는 흰색 반 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런너는 고독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싱그러운’ 기운이 휘발하여 그가 달려가는 뒤편에 ‘싱그러움’의 연흔이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봄, 마침내 봄이겠지요?  

    

    블로그 이웃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예전엔 미처 나이 예순의 무게를 몰랐다’라고 쓰셨더군요. 공감을 누르고 ‘모든 나이가 저마다의 무게를 힘겨워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댓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이 봄이 몇 번째 봄인가?

    나는 지난 몇십 년이고 매해 봄이면 나이 한 살을 더 먹었음을 갑자기 깨닫고는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 무게를 옳게 혹은 그르게 견뎌내며 또 이듬해 새봄을 맞았습니다. 물리적인 나이에 따른 뻔한 횟수 말고, 봄이 왔음을 문득 발견하고 그 봄에 그 나이의 무게를 가늠해 보기로는 이 봄이 몇 번째쯤 될까요. 기억이 가물가물 아니 아예 없는 애기 혹은 어린아이 때를 빼고, 정신줄을 놓치고 쫓기듯 살아온 전쟁같은 몇 년도 빼야 셈이 가능하겠지요. 

    제가 셀 수 있는 봄은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만큼만입니다. 그 매번의 봄의 크기도 기억도, 선명함도 다 제각각입니다. 왜 그런지 생애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기억되는 초등학교 4학년의 봄 소풍, 김밥과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먹던 창경원에 빼곡했던 사람들과 나른한 동물들이 앉아있던 동물사와 단청으로 울긋불긋한 높은 지붕의 궁궐은 또렷합니다. 대학 생활 내내 지겹도록 M.T 다녔던 청평과 대성리의 봄 밤 역시 또렷하구요, 태어난 지 100일 된 딸아이를 유모차에 앉혀 우리 팀이 농구 연습하던 성신여대 체육관에 처음으로 데리고 갔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 외에도 수 많은 봄, 봄, 또렷하고 선명한 봄들. 

    봄이야 늘 같은 봄일 거라 생각해서, 봄이든 여름이든 그게 뭐 대수라서, 마음에 바쁘고 분과 화가 차서, 어 어 하다보니 이미 짧게 지나가 버린 계절이어서, 제 인생에 몇 봄은 흔적도 없습니다. 잊혀진 봄은 안타깝습니다. 그 봄에도 뭔가 중요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을텐데. 앞으로의 봄은 그래서 최대한 선명하게 기억하려 합니다. 물리적으로도 몇 번 안 남았더라구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래서 오늘의 목포행은 봄 여행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남도의 따뜻한 공기도 들이마시고, 푸근한 분들의 웃음도 잘 기억하려구요. 오가는 기차 속에서 이렇게 몇 자 적고, 차창 밖의 경치를 보는 것 역시 제대로 된 봄 여행일 테니까요.


    간이 맞으면 홍탁 한 잔 서둘러 하고 귀경하려 합니다, 역전에 파는 집이 있다면. 바라건대 목포에 봄꽃이 소담하기를.

    

홍탁 실패

    봄 잘 맞으세요.


https://youtu.be/KXbbgG3JP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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