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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May 08. 2022

그땐 그랬...던 적이 있었지..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


    밤 늦게 퇴근하니 딸아이가 클리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 아빠, 이거 잘 챙겨야지. ㅇㅇ삼촌 건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밥 먹을 준비를 하면서 팡일을 열어보았습니다. 아주 예전의 브리핑 자료 몇 개와 1998년 3월 7일의 예식을 알리는 일곱 컷짜리 수제 카툰 청첩장이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다시 한 편으로 아득해졌습니다. 식탁에 앉아 - 엄밀히 말하면야 '식탁의 의자에 앉아'가 맞지만 거 왜 관용적으루다가 삽시다^^ - 꼼꼼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제법 여러 장에 틀을 잡고 초벌을 그리고 수정을 했던, 곡진한 정성의 기억이 배어 있었습니다. 생각은 너울너울 그 무렵으로.


    저도 결혼이 또래들 보다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친구가 날을 잡았습니다. 나름대로 초감각적으로 특별한 청첩장을 만들어서 친구의 개인적인 청첩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게 쬐금 유행이었습니다. 아니 약간 간지가 나는 느낌?

    해서 시작했지요. 하지만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좋을까. 몇날을 고민하면서 스토리 라인을 짰고, 카툰을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그림이 잘 될리가 없지요. 제가 비록 '소년천재화공' 소리를 들으며 수 차례의 사생대회와 교내 포스터 대회, 문예대회 등등에서 입선, 가작, 우수상, 차하 등을 휩쓸었다지만 - 장원 혹은 최우수상 등의 명분만 화려한 상은 미술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벗들을 위하여 기꺼이 양보하였음이외다 - 학문의 길에 전념하고자 절필을 한 지 어언 20년. 감각은 새파랗게 날 선 회칼이었으나 손끝은 목검의 둔탁함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는 법.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당시 장안에 이름 석 자가 짜르르하던 박광수 작가의 ''광수생각"을 접하게 되었고, 그 책의 그림체가 제가 추구하던 고결하고도 단아한 스토리에 정확히 부합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 그의 '풍(風)'을 오마주 혹은 샘플링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 입길에 오르는 모모 장관이나 그들의 자녀들 이름에 따라다니는 "표절"이라는 단어와는 그 근본이 다른 것임에 모두 동의하실 겝니다.)

    하룻밤 새에 백발이 되었다는 한석봉의 마음으로 수십 장의 파지를 만들어 내며 그림의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닦고, 조이고, 기름쳐 완성한 정본을 몇 장 복사하여 색을 입히고,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물론 새긴 것은 아니고 썼습니다만 왠지 장인의 품격이 필요한 듯 하여...)

    그중 잘 된 것으로 친구와 그의 정혼녀에게 전달하며 품평을 받는데... 어찌나 조마조마 했는지요.   받아주어 감사했고 후일 잘 썼다는 인사에 감읍했습니다.

    그때의 상황과 기억은 이렇게 제법 생생합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 전의 여러 날과 그 이후의 여러 날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수 많은 날들과 상황과 일들과 물상적인 기억들은 이렇게 아직은 제법 생생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십여 년 전의 '걸작'을 보면서 슬퍼졌습니다. 수 많은 날들과 상황과 일들과 기억들은 제법 떠올리는데 그때들의 감정이, 느낌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뻐하고 가슴 아프게 슬퍼하고, 치를 떨며 분노했거나 벙긋 웃으며 즐거워했을 그때들의 감정이, 느낌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철저하게 객관화한 책을 읽는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의 넋두리를 필요해 의해서 의무적으로 들을 때처럼 말입니다.


    세월의 더께에 무뎌져서 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희노애락의 감정에 민감해한다는 것이 결국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판단이 온 뇌세포를 장악해 버린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그런 날들의 지난 감정이란 밀려왔다 사그러들면서, 똑 부러지게 정의할 수 없는 회한의 찌꺼기만을 오래오래 남길 뿐이었다는 아픈 경험치들의 결과일까요. 그저 소주잔에 담겨 털어넣으면 숙취처럼 오래 남는 그런 것으로.


    그럼에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안타깝고 간절합니다.  아니.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속을 짓누르는 답답합과 울분의 모든 감정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잊힐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슬퍼할지 혹은 다행스러워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는 되도록 이 감정과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북받침이 없는 삶은 너무 무료할 것 같거든요.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에 제법 풋풋했던 청년이 있었다네요. 믿을 수 없지만...

https://youtu.be/zL65bxRcH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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