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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Dec 15. 2023

歌痕-8. 슬픈 운명

The Centaur, (Joanne Glasscock. 1969)


   나는 LP판을 몇 차례나 꺼냈다 넣었다 했다. 가격이 3,500원, 빽판 5~6장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매니저 형이 예산을 얼마나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유명하지 않은 팝 가수의 라이센스 음반을 살 만큼의 여유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 청계천에 나온 것도 거의 5개월 남짓만이었다. 그래도 말은 해보자.


   "형. 이 판 사면 안 돼요? 빽판이 안 나오는 가순데."

   "누군데? 조안 글라스콕? 무슨 이름이 이렇노? 유리 성기가 뭐꼬? 크크크."

   "아 형. 그러지 말고. 노래 좋아요. 'The Centaur'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리퀘스트 많이 들어오나? 난 한 번도 몬 들었는데."

   "그렇진 않은데, 노래 정말 좋아요."

   "그라믄 안 된다. 오늘은 20장 정도에 이문세랑 해바라기 사야 된다. 일마야. 우리는 음악감상실 아이다. 리퀘스트 중심 아이가?"   

  

   나는 Joanne Glasscock의 앨범을 별도의 봉투에 담아 애지중지 챙겼다. 학생 신분인 나에게 삼천오백 원은 짜장면 예닐곱 그릇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매니저 형 말마따나 유명한 가수도 아니었고 원래부터 잘 알던 곡도 아니었다. 얼마 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고 마음에 새긴 곡이었는데 오늘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다방의 음악실용 LP판을 사러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이 레코드 가게에 한 장밖에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영영 못 보지 않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부족한 돈은 나중에 알바 월급에서 제하기로 하고 과감하게 질렀다.   

  

   흑석동으로 오는 내내 나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The Centaur"를 볼륨을 왕창 올리고 듣고 싶었다. 다사랑 다방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사 온 LP와 카세트테이프들을 정리하는 사이에 매니저 형과 김이 소주 자리를 깔았다. 쥐포와 새우깡에 휴일 근무임을 고려한 특별 안주로 돼지고기 고추장조림 캔이 갖춰졌다.

   "The Centaur"를 턴테이블에 올리려는데 매니저 형이 음악실에 대고 소리쳤다.

   "'해바라기'부터 걸어봐라."

   아티스트의 감성을 저리도 모르다니. 경영자와 알바가 공존하는 세상은 감성보다 계급이다. 젠장. 왼쪽 턴테이블에 "해바라기"를 걸고 오른쪽에는 "이문세"를 걸었다. 텅 빈 다방 안에 감미롭고 가슴 절절한 노래들이 큰 볼륨으로 채워졌다. 셋은 연신 잔을 채우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잔을 비웠다. 사이드 B의 "어허야 둥기둥기"와 함께 술자리는 끝났다. 형은 피곤하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김은 술을 더 사 온다며 슈퍼로 향했다. 나는 드디어 "The Centaur"를 걸었다. 볼륨은 좀 더 올렸다.     

   하프를 뜯는 듯한 몽환적이고 감미로운 기타의 짧은 전주에 이어  부드럽게 깊이가 있어 왠지 슬픔을 안겨주는 Joanne Glasscock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옆에 가깝게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았다.  

   

   On that hill a centaur stands

   Half stallion and half man     


   백 퍼센트는 아니었지만, 가사가 놀랄 만치 또박또박 잘 들렸다. 술기운으로 감각이 예민해진 데다 한껏 집중해서 들었기 때문이리라. 속삭이듯 이야기하듯 노래를 시작했던 가수는 어느새 짙은 감정을 담아 눈물처럼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정확하지 않은 가사를 따라 부르며 자신도 모르는 새 고양되었다. 벗어날 수 없는 반인반수의 슬픈 숙명이 다방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슈퍼에 다녀온 김은 한 번 더 "The Centaur" 위에 턴테이블의 바늘을 얹어주었다.


   나는 만족스러웠다. 이 곡은 신청이 들어올 일이 거의 없을 것이었다. 오늘처럼 영업을 마친 밤에 혼자서 들으면 될 일이었고, 간혹 손님이 없는 시간에 한 번씩 틀어주면 좋을 것이었다. 자신만이 내밀하게 완상할 수 있는 호사를 갖추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대학가 음악다방의 디제이는 늘 손님들의 신청곡을 틀어주느라 바빴다. 이 무렵에는 해바라기와 이문세의 신청이 끊이지 않아 다방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월요일이면 지난 주말에 "가요 톱 텐"을 시청하고, "쇼 비디오 자키"에서 내보낸 팝송의 뮤직 비디오에 흠뻑 빠져든 수많은 청춘이 다방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그 노래들을 쪽지에 적어 음악실의 통유리 아래쪽 구석에 "Request Music"이라고 건조하게 써놓은 작은 유리 구멍으로 마구 밀어 넣었다. 제목과 가수만 적은 것도 있고, 하트모양을 그린 것도 있고, 단정한 글씨로 사연과 함께 신청한 것들도 있었다. DJ들은 명량해협에 몰려든 왜선 330여 척을 바라보는 이순신 수군의 병사들처럼 각오를 다지는 것이었다.


   영업이 끝난 늦은 시간 DJ들은 모여 소주를 마시며 자신들이 듣고 싶은 곡을 크게 틀었다. 하루 종일 신청곡에 지친 귀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땅히 음악 감상을 할 만한 곳이 흔치 않은 시절에 다방의 LP와 음향 기기는 그들의 소년스러운 자부심이자 그들에게 부어진 은총이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과연 단박에 맺어지는 인연 혹은 운명적 만남이란 있는 것일까?      

   내가 일하던 다방은 근처의 대학교 방송국 학생들이 자주 오는 곳이었다. 내가 나만의 호사를 만끽했던 그다음 날 저녁, 그들이 행사 뒤풀이를 끝냈는지 다들 불콰해져서 들어왔다. 주흥이 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마도 누구의 신청곡이 먼저 나오나 하는 식의 자기들끼리만의 게임을 하는가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 곡씩을 써서 음악실에 넣었다. 나는 ‘그래, 좋다. 재미있게 놀아라.’ 하는 마음으로 다 틀어주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랬더니 또다시 한 뭉치의 신청곡 메모지가 들어왔는데, ‘오호라~ 이것 봐라!’ 평소에 다방에서는 좀체 듣기 어렵고, 신청도 거의 안 들어오는 곡들이 주욱 적혀있었다.


   이런 경우는, 해설을 붙이자면, 학생들이 각자의 필살기 곡을 신청하여 (중요한 것은 '애청곡'이 아니라 다소 난해하고 희소성이 높은 곡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가요는 없다) 첫째, 자신의 고매한 음악성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둘째, 그 곡을 모르는 DJ를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신청곡이 안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고약하고 속 보이는 게임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대학 방송국의 피디, 작가, DJ들이니 선곡의 수준은 꽤 높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소화가 가능했지만, 다방의 음반 소장량의 한계에 따라 없는 곡이 있는 것이야 당연지사. (모르는 곡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영업 비밀이므로 밝히지 않는다) 가끔 있는 이런 때를 대비한 DJ들의 노하우가 있다. 그중 난도가 높은 곡과 비교적 편한 곡을 섞어 틀어주되 몇몇 학생이 신청한 어려운 곡과 쉬운 곡들은 아예 무시하는 것이다. 이러면 ‘아! 이 다방에 LP도 있고 저 DJ가 노래도 알지만, 오늘의 선곡은 아니란 뜻인가?’ 하며 서로 묵언의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이날도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가는데 마지막으로 그중의 한 여학생이 - 심리학과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신청곡 메모지를 넣고 갔다.

   오오오! Joanne Glasscock의 “The Centaur."

   그날 이전에 단 한 번도 신청이 들어온 적이 없었고 그날 이후로도 신청이 들어올 일이 없는, 나의 호사인 그 노래. 그녀의 필살기였으리라.

   그러나.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녀는 상상조차 못 했을, 역사가, 그 다방에서, 나로 인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전날, 내가, 내 돈을 털어, 그 음반을 사 온 것, 그것도 정식 라.이.센.스 음반을.

     

   나는 자리로 돌아간 그녀가 나의 반응을 관찰할 때 보라는 듯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은밀히 그 비장의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승리감에 약간 으쓱하는 그녀의 표정을 안 보는 척 즐기며 그녀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 스위치를 올리고 볼륨을 평소보다 다소 크게 높였다.

   '하프를 뜯는 듯한 몽환적이고 감미로운 기타의 짧은 전주에 이어 부드럽게 깊이가 있어 왠지 슬픔을 안겨주는 Joanne Glasscock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그녀의 표정. 그녀는 게임의 도구로서뿐 아니라 진심으로 그 곡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노래는 끝났고, 그들 방송국 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를 가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스프링 자국이 남은, 대학노트를 세 번 접은 메모 한 장이 들려 있었고, 출입구 옆의 메모판에 그것을 꽂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음악실 유리에 비쳤다.

   직감적으로 나는 나가서 메모판을 보았다. DJ형께. 급히 쓴, 그러나 또박또박 힘주어 쓴 메모는 '쎈토, 잘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고마웠습니다. 우리 학교시죠?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네요. 또 봬요.' 였다.


   그다음 날, 혼자, 또 그다음 날,  또 그다음의 여러 날, 그녀는, 혼자 또는 여럿이, 왔고 다방 안에는 "The Centaur"가 흘렀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과연 단박에'  아름답고 뜨거운 그들의 인연이 맺어졌거나 혹은 '운명적 만남'이 되었을까?

   아쉽지만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새치가 아님을 깨달은 지 오래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세월의 물결 속에 어떤 기억은 희미해지는 것이다. 아니면 부러 윤색하거나. 다만 정오와 오후 5시의 캠퍼스에는 대학 방송국이 내보내는 "The Centaur"가 가끔씩, 약속처럼, 흘렀다는 기억은 남았다. 물론, 나는 단지 음악을 사랑했고 커피를 좋아했던 순수한 20대의 청년이었다.   

   

   슬픈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많다. 통계에 따르면 사랑의 기쁨에 대한 노래 한 곡이 발표될 때 슬픈 사랑 노래는 108곡이 발표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 그런 조사는 본 바가 없다. 그럼에도 느낌상 슬픈 노래가 훨씬 많은 것은 슬픈 사랑이 추는 처연함과 공감 때문이 아닐까. 모름지기 비련, 실연, 애련, 절련, 외사랑은 울림이 있되, 가연은 중매업체이고 예쁜 사랑은 연예인의 스캔들을 미화하는 외피일 뿐이니.     

   그 많은 슬픈 사랑의 노래 중에 이 곡처럼 존재의 한계로 인한 비극을 다룬 곡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의 이종교배로 인해 반인반수로 태어난 존재. 육체와 정신의 탁월함을 지녔지만 괴물인 존재. 육체는 정신에 목마르고 정신은 육체를 감당 못 하니 그로 인해 그에게 사랑은 잉태되지 못한다. 이는 슬픈 사랑의 노래이며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비대칭과 불균형의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 타협과 야합, 원칙과 편의, 정의와 실재, 이성과 본능, 부러지거나 굽히거나, 불의 앞에서의 굴종... 셀 수없이 많은 괴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이 상징 안에 녹아있다.


   they stood silent and silent there

  ...

   they stood silent and then they cried   

  

  이 곡에서 반복되는 위의 두 절의 가사는 서로 엇나간 사랑과 운명 앞에 쓸쓸히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린다.     


   겨울비가 내리는 저녁에 우연히 "The Centaur"를 들었다. 떠오르는 옛일을 적는다. 유튜브는 고맙다.


https://youtu.be/rAZ8Dn0cHCw?si=HUEuPkERR_QnJOF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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