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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파랑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청록색에 대하여.

by 문지구


사랑은 원래 중의적이다. 내가 하는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해 마침내 숨소리까지도 중의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붕괴‘가 ’ 무너지고 깨어짐‘이 되는 것도, 단어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파랑이었다가 녹색으로 보이고, 산이었다가 바다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둘 중 어떤 건데?’라는 질문이 통하지 않는 것이며, 끝나는 순간까지 능동적으로 풀어야 하는 난제와 같은 것이다. 사랑 앞에 단어의 의미는 절대 단일하지 않다.


서래와 해준은 늘 중의 속에 있다. 청록빛 중의에는 녹색 조명 아래 잠에 들던 날과 파란 바다에서 재회하던 날이 함께 있다. 숨소리를 느끼며 해준을 재워주고 펜타닐로 영원한 잠을 선물해 주듯, 푸른 바다를 닮은 서래는 녹색 평온을 선사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 중의가 발현되기 전에는 늘 붉은색이 그들 곁에 있다. 그 보색을 걷어내고 나면 그들은 만나게 된다. 1부에서 서래가 해준에게 붉은 봉투를 보여주고 모든 알리바이가 입증되자 녹색으로 둘러싸인 절에서 데이트를 했던 것처럼, 둘의 사랑은 붉은색을 벗겨내고부터 가속화된다.

그들이 이별하고 난 뒤인 2부의 시작, 석류를 손질하는 해준과 붉은 원피스 차림의 서래. 빨간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행인처럼 그들은 각각의 장소에서 멈춰있다. 둘이 만나기 위해선 빨간 불이 녹색 불로 바뀌어야 한다.


푸른 수영장에 임호산의 시체를 띄운 물은 피로 물들어 있다. 서래는 그걸 모두 닦아낸다. “당신 생각이 났어요.”라는 서래의 말속에는, 붉은색이 사라져야 우리의 중의가 비로소 바로 보일 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말도 다른 말로 치환하지 않았던가.


치환된 말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건 그들의 상징 같은 중의성이고, 사랑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것은 결국 서로의 말을 따라 하며 생긴다. 히데코가 숙희의 말을 따라 하듯, 사랑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은 뱉어보지 않은 단어와도 같으니까. 그리하여 외국어를 따라 하는 서래의 모습은 사랑을 배우는 우리의 모습이다. 늘 듣던 한국어 단어들이 서래의 입을 통하니 새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서래가 사랑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커다란 ’ 말 따라 하기 구조‘를 띤다. 작게는 인물들의 따라 하기부터 크게는 1부와 2부의 대치까지.


1부 권총 사격 씬에서 서래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수완과 이를 반박하려는 해준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넌 그런 얘기 들으면, 학대당한 사람이 범인이란 생각부터 드냐?”

“팀장님은 어떤 생각부터 드는데요?”

“불쌍하다는 생각. “

이 대화는 2부 서래와 해준의 신문 씬에 또 한 번 등장한다.


“난 이런 생각부터 할 것 같아요. 거 참 공교롭네… 서래 씨는 무슨 생각부터 할 것 같아요? “

“참 불쌍한 여자네…”


해준과 이별하고부터 사랑을 깨달은 서래는 이미 알았을 것이다. 해준이 그때의 자신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말이다. 알고 있는데 발버둥 치는 해준을 보며 더 이상 담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때 그가 했을 말을 내뱉는다. 해준은 그때 자신의 감정을 상기시키며 말문이 막힌다.


1부와 2부의 시작과 끝도 그렇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기억하는가. 비금봉 정상에서 인공눈물을 넣으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던 해준이었다.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해준은 침잠의 시작을 겪는다. 산꼭대기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안개 낀 이포 바다에 다다랐는데, 해준은 여전히 비금봉에서처럼 인공눈물을 들이붓는다.


사랑의 중의성에 대한 비유가 뻗어나가 커다란 구조에 이르면서, 능동적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서래와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해준의 처지가 자연스레 대조된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따라 하고, 1부와 2부가 반복과 변주를 거친다. 서래는 해준을 알고, 해준은 서래를 통해 자신을 알아간다. (뒤늦게 깨닫는 것에 가깝지만.) 이 커다란 구조가 축조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란 언어를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만드는 지독한 환상은 깜깜한 숲과 같다. 사랑 속에서 제 길을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해준은 아니다. 시종일관 헤매고 붕괴되었다가 끝내 우습게 처연해진다. 이 모든 사건과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떤 결말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서래뿐이다.


자신은 인자한 사람이 아니라서 바다가 좋다고 말했던 서래. 그 말처럼 서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래는 본질을 아는 사람이다. 서래에게 청록색을 보여준다면, 파랑이나 초록이라는 선택지 중에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건 파랑이나 초록이 아닌데요? 청록색은 그냥 청록색입니다.”

질곡동 사건의 본질도 서래는 안다. 홍산오가 죽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라는 것. 지금 이 사랑의 본질도 서래만이 알고 있다. 지혜를 갖춘 서래는 그렇게 자신의 서사까지 완성시킨다. 이 사랑의 시나리오도 내러티브도 모두 서래의 소유인 셈이다.


해준의 잠을 재워주던 서래는 미결이란 결심을 하고 그에게 불면의 여생을 안겨준다. 더 이상 녹색을 선사해주지 않는다. 홀로 붉은 보자기를 벗겨 녹색 펜타닐을 꺼내 자신이 만든 결말을 향해 간다. 영원을 향해 걷는다. 미결과 영원, 그 두 의미를 모두 취할 수 있는 중의적 결말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피로 젖은 청록색 원피스를 태운 재 속에 반듯하게 남아 반짝이던 단추처럼, 서래의 몸은 꼿꼿하다. 자신이 어떤 말에 사랑을 담았는지도 모르는 해준은 안갯속에서 낡은 얼굴로 아이처럼 동동거린다.


그리하여 서래는 어디로 가는가. 모두가 알고 있듯 서래는 죽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래가 죽었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죽어있는 서래를 우리 모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있더라도 이 사랑이 미결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아는 서래는 절대로 해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 확실한 암시가 있었겠지.

그렇다면 서래는 정말 죽었을까. 앞서 말했듯 죽었다는 확실한 장치도 심어두지 않았다. 그래서 결말이 뭐야?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답은 영화 안에 있다.


결말 자체가 청록빛인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결론을 짓기보다는 체험을 시키는 쪽을 택한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자아 갈등과 합리화를 태주의 솔직한 욕망으로 하여금 체험시키고 (박쥐), 금자의 납치 살인을 제니의 회고로 하여금 체험시키고 (친절한 금자 씨), 미도가 딸이든 아니든 혀가 잘린 대수로 하여금 소문의 고통을 체험시키면서 (올드보이), 결말로 치닫는 관객은 답이 아닌 질문에 도착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질문이 아닌 답에 도착하는 유일한 영화를 말해보자면 그건 <아가씨> 일 것이다. 그것은 개인이 어긴 금기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금기이기에.

<헤어질 결심>의 금기는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야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람들이 가장 씹기 좋아하는 ‘사랑’에 대한 금기가 아니던가. 그저 체험하고 질문하고 반문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사랑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서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애초에 이 질문은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차피 서래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다. 그 여부를 가르는 암시 따위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미결사건을 함께 겪는다. 해준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래는 미결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문득문득 떠오를 사랑이란 질문을 가슴에 남긴다.


파도 소리 안에 갇힌 것 같은 해준을 보며 우린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어떤 이의 존재 자체가 미결이 되는 것을 체험한다.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서서히 피어오른 서래라는 존재는 거센 파도가 되어 해준을, 그리고 우리를 덮친다.


그렇게 초록빛 영면에 든 사랑은 새파란 파도 어딘가에서 고고히 숨 쉬고, 해가 저문다. 영원한 미결사건을 손에 쥔 남자의 잠 못 드는 밤이 가까워지고 안개가 짙어진다. 그 안개는 앞으로도 걷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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