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목욕탕이 있다. 목욕탕 내의 사우나실은 마치 동네 사랑방 같다.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고, 가끔은 주변에 뭐가 들어선다는 소식 같은 유용한 정보까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도 금세 지나가곤 한다.
오늘 사우나실에 들어가니 아주머니 두 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드라마 <굿파트너>가 떠올랐다.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 큰 언니가 다른 남자랑 사귀고 있었대요. 그걸 큰 형부가 알고 집을 나갔는데. 봐봐요, 아니 바람피운 사람이 아니라 형부가 집을 나간 게 이해가 돼요?"
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러네"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조카 결혼식 때문에 백화점에 가방을 사러 갔는데, 글쎄 거기서 형부가 젊은 여자랑 팔짱을 끼고 가방 가게에 들어가는 걸 본 거예요.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었죠. 형부는 우리를 못 봤거든요. 언니가 그 사진을 보고 형부한테 물어보니 형부가 말하길 사무실 경리 아가씨다 내 골프가방 사는데 가방 골라주러 같이 간 거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근데 알고 보니 언니보다 훨씬 전에 바람을 피웠더라고요. 그러니 먼저 집을 나갔겠죠. 이상하다 했다니까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그들이 이혼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래서 이혼했어, 안 했어?"
"했어요. 재산은 둘 다 똑같이 나눠가졌어요. 똑같이 나눠 가지던데요. 근데 빚도 똑같이 나눠 가지더만요. 그래서 빚 제외하고 나눠 가졌어요"
"그럼 애들은?"
"애들은 다 컸어요. 하나는 여기 살고 하나는 저쪽에 집을 해줬더라고요"
"그래... 근데 그쪽은 애들이 없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언니랑 만난다는 사람이 처음에 어디 교수라고 했는데 교수가 아니라 그냥 직원이라고 그러는데... 나는 많이 못 배워서 그런지 옛날 형부가 좋았어요. 지금 만나는 이 사람은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는 거야"
"하하, 구관이 명관. 그리고 우리 언니는 지금 핑크 핑크 해서 우리말은 하나도 안 들어요. 핑크 핑크"
"나는 바람피우는 연놈들은 인간으로 안 봐.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지켜야지."
"우리 언니도 그랬어요. 바람피우는 사람들 정말 경멸했는데 자기한테 자상하게 해 주니 홀딱 빠지더라고요. 봐봐요, 멋진 남자가 잘해주고 고기도 발라서 주고 예쁘다 해주는데 안 넘어가는지. 언니 그래도 안 넘어가요?"
"나는 우리 신랑이 그렇게 고기도 발라주고 그래"
"우리 신랑은 그렇게 안 해주는데 내가 해주지."
그쯤에서 나는 사우나실에서 나왔다. 친언니의 이혼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 듣는 사람도 무덤덤하게 듣는 걸 보며,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가정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다들 사는 게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아무 거림 낌 없이 편하게 이야기한다.
요즘 사우나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다들 각자 나름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속을 털어내고, 잠시나마 위로를 얻는 것 같았다. ‘대문 열고 들어가면 문제없는 집이 없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누구나 저마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정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말하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은 채 혼자 감내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때는 속마음을 꽁꽁 숨기고 혼자 감내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창 시절, 우리 집의 여러 문제로 인해 즐거운 시간보다는 우울한 나날이 많았다. 우리 집 이야기는 창피해서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꽁꽁 숨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20대 중반이 되어 친구가 친언니의 이혼 이야기와 아버지의 음주로 엄마가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자기 얘기를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도 나는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숨겼다.
평생 우리 집 가정사를 말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40대 중후반이 되면서 하나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나 무거운 삶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 꺼내기가 힘들었지, 막상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예전에는 ‘왜 우리 집만 이렇게 힘들고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면서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며,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찰리 챌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멀리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모든 집이 저마다의 사연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말이다. 삶의 어려움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각자의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고 있다.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지만, 친구는 어쩌면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