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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홀로섬에서 온 편지

  400만 년 전, 수천 길 물속을 뚫고 검붉은 불기둥 하나로 솟아올랐다. 돌멩이가 날고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식어서 굳은 바위 위에 거듭해 붉은 용암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차가운 동해 한가운데 뜨거운 가슴으로 섰다.

  파도가 집요하게 상처 난 곳에 소금물을 뿌려댔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파도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밤에도 잠들지 못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마저 쏟아지는 물에 흔적을 감추었다. 퀭한 눈은 깊이를 알기 힘들고, 흠씬 두들겨 맞은 몸은 가누기가 힘들었다. 몸이 무너지고 뜯겨 나갔다. 차라리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 바닷속에 잠겼으면 했다.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 한 척 없는 바다가 휑했다. 찬바람이 가슴 한쪽을 쓸고 갔다. 달마저 사라진 밤에 나는 한 점 소리를 찾아 멀리 떨어진 낯선 바다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혼자인데 내 외로움이 크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지 멀리 떨어진 까닭만은 아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고독이 나를 더 깊은 쓸쓸함에 빠뜨렸다.

  나에게도 삶의 씨앗이 날아왔다. 한 움큼의 흙을 잡고 땅채송화가 피었다. 참나리꽃의 기상나팔 소리에 섬초롱꽃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흙이 쌓이고 섬괴불나무가 싹을 틔웠다. 꽃이 쓰러져 흙이 되고 다시 피기를 되풀이했다. 한 줌 흙이 모자라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린 나무들. 기름지지 못하고 바위뿐인 나에게 사철나무는 바람을 피해 옹기종기 무리를 이루었다. 벌과 나비도 모여들었다.

  찬물과 더운물을 따라온 친구들이 나의 바다에 모여들었다. 해초와 모자반은 숲을 이루어 고기를 향해 쉬어가라고 손짓했다. 해초에 몸을 숨긴 오징어와 물고기가 숨바꼭질했다. 혹돔이 굴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고등어와 꽁치는 장난꾸러기처럼 몰려다녔다. 이들을 따라온 강치는 나와 바다를 오고 가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뒤뚱거리며 다가와서 장난을 치다가 물로 뛰어들었다. 먹이를 먹고는 햇볕에 젖은 몸을 말렸다.

  이른 봄 바닷가에 둥지를 튼 괭이갈매기가 알을 낳았다. 알을 깨고 나온 수만 마리의 새끼가 우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새끼가 성장해 괭이갈매기가 떠나자 바다제비가 자리를 잡고 알을 낳았다. 내 몸은 다시 절벽을 메운 바다제비 새끼들로 북적거렸다. 해국이 나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면 다 자란 바다제비가 바쁘게 움직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날 채비하는 날갯짓이 요란했다.

  내 품에서는 가늘고 긴 꽃잎을 휘날리는 술패랭이꽃, 바람이 무서운 땅채송화, 네 장의 노란 꽃잎을 가진 번행초, 종을 매달아 놓은 섬초롱꽃이 딸랑거렸다. 꽃대 끝에 흰 꽃을 매단 쇠무릎, 황색 바탕에 검은 반점을 찍은 잎을 뒤로 말아 올린 참나리가 한껏 멋을 부렸다. 연보랏빛 꽃술을 찰랑찰랑 흔드는 술패랭이꽃, 길게 층을 이룬 꽃대에 돌려가며 꽃을 매단 참소리쟁이가 바람을 맞았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사철나무는 오늘도 굳건하게 하늘을 보고 섰다.

  어른이 되면 이마가 튀어나오는 혹돔, 검은 가로줄무늬로 얼룩말을 닮은 돌돔, 깜장이라 불리는 벵에돔, 등지느러미에 성긴 가시를 달고 다니는 개볼락이 먹이를 쫓아다녔다. 자리돔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알을 지키느라 바빴다. 따뜻하고 깊은 바다에 사는 연어병치, 밝은 살색을 가진 달고기가 우아하게 헤엄쳤다.

  괭이갈매기가 이른 아침부터 먹이를 물어 날랐다. 서로 먹으려는 새끼들의 입놀림이 둥지 안에 가득 찼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새끼들의 울음소리가 나를 덮었다. 새끼가 자라 떠나면 바다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나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의 고향이 된 지 오래고, 슴새, 솔잣새, 흑비둘기는 여행에 지친 몸을 쉬어갔다. 친구가 모여들어 더는 외롭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겁이 많아 집을 버린 바다제비는 가파른 절벽으로 이사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새끼의 죽음에 깊고도 슬픈 울음을 울었다. 그물을 피해 달아난 혹돔의 혹이 더 커졌다. 그물로 잡혀가던 친구들의 절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친구들이 끌려갔다. 미친 듯이 우는 파도의 몸부림이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친구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살기 위해 그물을 물어뜯는 강치를 잡으려고 어린 새끼를 잡았다. 사람들은 비정했다. 새끼를 구하려는 어미를 몽둥이로 두들겨 푸른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수년에 걸쳐 생명을 빼앗긴 강치와 자신의 색을 잃은 바다의 모습에 나는 말을 잃었다. 사람들의 만행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는 하늘만 원망했다.

  수온이 조금씩 올라갔다. 차가운 바다에서 활기찬 몸놀림을 보여주던 명태가 힘들어했다. 탱탱하던 피부가 늘어지고 잔병이 늘어났다.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던 나이 든 명태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주걱턱을 히죽거리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명태마저 떠나니 나의 웃음도 사라졌다. 강치와 명태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모습이 아득했다.

  사람들은 내 가슴에 ‘韓國領’이라는 명찰을 새겼다. 그러고는 외쳤다. 독도, 너는 우리 땅이라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슴에 태극 마크가 선명한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기악가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성악가는 목소리 높여 나를 찬미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다니,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면 나는 슬픔에 빠진다. 나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온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강치, 명태…, 나를 떠난 친구들은 언제쯤 돌아올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안부를 묻고 외친다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생태계를 복원해주어야 한다. 나는 강치, 명태가 함께 뛰어노는 풍요로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은 보전해 주는 만큼 돌려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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