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시 입원을 하셨다. 지난 2020년 암 수술하신 이후로 잦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었던 터라 이번 정기 검진 때 의사가 입원하라고 했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집에서 약 먹겠다며 입원을 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옳지 않았던 선택이 었음을 일주일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코로나에 걸렸고 암 수술 후 단 한 번도 백신을 맞지 않았고 폐질환 환자인 아빠는 위증증 환자로 분류되어 집에 엠블런스가 오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던 엄마는 아빠의 동생 중 그나마 엄마가 편하게(?) 생각하는 넷째 작은 아빠에게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 작은 아빠는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 같이 살며 대학을 다녔고 삼촌이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꽤 오랜 시간 같이 살았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삼촌은 꽤 많이 존재한다. 아침마다 엄마는 삼촌을 깨우라고 했고 대부분 삼촌은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는 삼촌 코를 잡아 비틀라고 나에게 말했고 난 그 삼촌의 기름기 가득한 얼굴의 코를 비트는 게 너무도 싫었지만, 그렇게 하면 삼촌은 일어났다. 그리곤 나에게 하는 첫마디가 내 이름을 부르며 설탕물을 타오라고 했었다. 난 그때 4살 5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였는데 그걸 그렇게 시켰다. 우리 엄마한테 타 달라고 하기 미안해서였겠지만 난 엄마한테 말했고 엄마는 설탕물? 꿀물을 타서 나에게 주었고 난 그걸 항상 삼촌 방으로 전달해야 했다. 삼촌의 대학 생활 동안 드나들던 여자들도, 삼촌이 없는데 꽃을 들고 찾아온 여자도 생각난다. 그리고 삼촌 때문에 아팠던 기억도 있다. 삼촌이 내 팔을 잡아 댕겨 팔이 빠져 응급실에 갔던 기억도 있다. 어느 날은 자다 일어나 화장실 가는 길에 불 켜져 있는 삼촌 방에 들어갔었고 제도판(?)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던 건축과 다니던 삼촌의 모습도 생각난다.
또 내가 7살이었을 때 아빠가 사준 두 발 자전거에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내 이름을 글씨 잘 쓴 삼촌이 써주기도 했고 이것 때문에 자전거 잃어버렸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서워서 계속 보조 바퀴 달린 채로 타고 다니는 나를 두 발 자전거 탈 수 있게 뒤에서 밀어주다 놓았던 것도 삼촌이었다.
아마도 삼촌은 내가 7살 8살 무렵에 우리 집에서 나가 독립을 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삼촌이 가끔씩 우리 집에 들르고는 했다. 명절도 아니고 내 생일도 아빠 생신도 엄마 생신도 동생 생일도 본인 생일도 아닌데.... 막내 고모도 삼촌처럼 우리 집에 느닷없이 오는 날들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을 반갑게 맞이 했었다. 그 이유를 나중에 막내 고모 때문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3학년쯤 되었을 때로 기억된다. 고모가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것을 들었고 상대방이 뭐라 물어봤는지 모르지만 고모는 말했다. '응 나 돈 생겼어' 그때 알았다. 삼촌과 고모는 돈이 떨어지면 우리 집에 왔던 거였다. 돈 달라고 우리 아빠 엄마에게.... 대학 다니던 삼촌도 아빠가 대학 안 간다는 삼촌을 대학에 집어넣었고 학비를 대주고 우리 집에 같이 데리고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 삼촌에게 다른 형제보다 그래도 가깝다 느껴서 그리고 본인의 형이 아프니 엄마는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오랜만에 전화해서 뭐하냐 물었더니 골프 치러 왔다. 무슨 일이냐? 라며 매우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그래서 그냥 끊을까 하다가 '형이 음압 병동에 입원한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삼촌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병원비라도 달라고 할까 봐 그렇게 받은 것 같다고... 엄마는 병원비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었다. 너를 끔찍하게 생각했던 형이니까 그 형이 또 아프니까 전화라도 한번 해보라고 동생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아빠니까...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전화를 했던 거였다.
아빠 엄마가 삼촌을 공부시켰으니 돈을 요구했다거나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너무도 힘들었을 때도 내 동생 대학 갈 때 학비를 못 내서 동생이 가고 싶은 학교 못 가고 국립대에 보낼 때도 아빠는 말하지 않았었다. 내 딸 학비 보태 달라고.... 딸의 원망을 그냥 받은 그런 아빠인데... 아빠 수술하고 난 후 명절에 전화도 찾아오는 것도 없었고 착한 작은 엄마만 종종 엄마한테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좋았던 삼촌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의 삼촌 아니 넷째 작은 아빠의 행동들로 인해 아름답기보다는 퇴색되었고 나보다 더 큰 어른으로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냥 마주치기 싫은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아빠는 코로나 증상은 괜찮아져 음압 병동에서는 나오게 되었지만 결핵균으로 인해 격리 병동에 입원하고 계시다 다행인 건 담주에는 격리 병동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기 신다고 한다. 조금 더 좋아 지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매일 듣고 있는 아빠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의욕이 없어져 가는 것 같아 매우 걱정이 된다.
'아빠! 힘내세요... 저도 동생도 지금 일 때문에 너무 힘들지만 잘 이겨내 나가려고 하고 있으니 아빠도 잘 견뎌 주세요. 퇴원하시는 날 아빠가 좋아하는 아빠 큰딸 표 파스타 엄청 많이 해 드릴게요. 그리고 아빠 좋아하시는 카페 모카 생크림 듬북 올려서 벤티 사이즈로 사드리고 단거 많이 드신다 잔소리 안 할게요. 밤에 간식 드신다고 몰래 과자 챙겨 방으로 가는 아빠를 봐도 모른 척할게요…’
' 하느님! 제가 아빠 수술할 때 간절히 드렸던 기도 들어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