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이 필요해!
지난 6월 말 길고 길었던 34년여 직장생활을 마치고 퇴직을 했다. 퇴직준비를 위한 연수 기간을 포함하면 1년 6개월 동안 그동안 꾹꾹 눌러 적어 놓았던 많은 버킷리스트에 형광펜을 그어가며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지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테니스도 맘껏 즐기며 시합도 나가보고, 집사람과 해외여행. 국내여행도 틈틈이 가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도 하고 있다. 또한 블로그, 유튜브 강좌도 듣고 귀촌 커뮤니티 활동도 하고 작은 세컨드하우스 마련 및 봉사활동을 위해 집수리, 전기, 조경 및 요리를 배우는 등 앞으로의 삶을 위해 이런저런 준비도 병행하면서 나름 바쁜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퇴직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가끔씩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마치 '그동안 일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몇 년은 더 일해야지 왜 놀고 있는 거지? 사회생활 잘못해서 오라는 데가 없어 그런가...'라고 하는 듯한 표정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노는 게 아니냐'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들이 느껴져 가끔씩 특정 모임에 가거나 일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지난 명절에 처가에 가서 장인어른이 뭐 하냐고 물으시길래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아! 쉬고 있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한심하다는 듯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 지 일을 해야지 그렇게 맨날 놀면 어떡하냐."라고 하시는 거다. 평소 장인어른과는 사이가 안좋은 것도 아니기에 그저 노파심에 하신 말씀이시겠지만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왔다. 34년을 휴직한 번 안 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어찌 저렇게 말씀하실까...
사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입사해 지난 34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다른 진로를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홀몸이 아니기에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또한 영리가 목적이 아닌 직업의 특성상 열심히 일은 했지만 많은 돈을 벌어 조기 은퇴하는 파이어족도 될 수 없었다.
아무튼 하고 싶은 것들을 후일로 미루고 모셨던 장관님이 나를 직원들의 롤 모델이라 할 만큼 그저 성실하게 일하며 마라톤 풀코스 같은 공직생활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렇게 34년을 손꼽아 기다렸던 미래가 오늘이건만 또 얼마나 대단한 내일을 위해 쉼 없이 또 다른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 경제력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엇을 위해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인생의 황금기를 희생해 가며 또 일터로 나가야 하는 걸까? 더 번다해도 경제적으로 조금 풍요롭기는 하겠지만 하고 싶은 것들이 바뀌거나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또 지금 살고 있는 생활패턴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동안 겪었던 직·간접경험 들에 비추어 보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젊고 열정이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은 것이지 나이가 더 들면 아무래도 할 수 있는 것들의 종류와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34년 앞만 보고 살아왔기에 충분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색깔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물론 하염없이 쉬거나 놀며 살 생각은 아니다. 얼마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나 스스로에게 열심히 살아온 젊은 시절의 노고를 보상해 준다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도록 하고 싶다. 그런 후에 적당한 일자리도 찾고 요즘 배우는 것들을 토대로 봉사활동도 하면서 살 생각이다.
살아오며 내 생각이 늘 맞는 것만은 아니었던 경험들이 있기에 다시 곱씹어 생각해도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잣대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이해시켜야 할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겨울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