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10)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 전 병에서 회복 중인 와이프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늠을 해 보았다. 기간을 넉넉하게 잡으면 쉬엄쉬엄 어찌어찌 완주도 할 수 있겠지만 집안 행사와 모임, 반려견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그곳에서 보낼 수 있는 날짜는 38일이다.
혼자라면 이런저런 고민 없이 주어진 기간에 완주만을 최우선 목표로 했었겠지만 와이프와 완주는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이라 생각되었기에 처음 목표는 순례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이었고, 첫 목표가 달성되면 그다음은 100km까지, 또 그다음은 중간지점인 사하군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잡아보았다.
만약 제대로 순례도 해보지 못하고 돌아오면 비싼 비행깃값이 아깝다는 생각에 순례 시작 전 파리에서 2박 3일, 돌아오기 전 포르투에서 2박 3일을 보내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총 38일 중 오가는 날짜와 그렇게 4일을 빼니 32일이 남았다. 거기에 꼭 가보고 싶은 땅끝마을, 피스테라도 하루를 할애하기로 했다.
또 팜플로나 등 3개 대도시에서 관광과 컨디션 조절을 위해 연박(하루 더 머묾)을 하기로 계획을 세우니 28일이 남는다. 일반적 완주기간이 33일이니 28일을 걷고 다섯 구간을 점프(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동)하여 산티아고까지 가는 것으로 일단 계획은 세워 보았다.
물론 와이프 건강이 안 좋아지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지만 비록 5일은 점프를 하지만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가야 순례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4.11일 순례를 시작하고 연박을 하려 했던 3번째 목적지인 대도시 팜플로나에서 원래 세웠던 계획이 변경되기 시작했다.
팜플로나에 조금 일찍 도착해 가볼 만한 곳을 대부분 구경을 한 후 저녁을 먹는데 와이프 컨디션이 괜찮아 굳이 연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연박을 하며 하루 여행객이 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리듬이 깨져 다시 순례자 모드로 전환하는 게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어 다음날 아침 바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정을 변경해서 연박 없이 순례를 진행하면서 일정에 여유가 생기고 약간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잘하면 중간지점인 사하군까지는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와이프가 본인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며 완주를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컨디션에 따라 업 다운이 반복되며 늘 노심초사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놀랍게도 30일을 연박도 점프도 없이 하루 평균 26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0km 전 라바콜라까지 도착했다. 다음날 12시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10km 전 마을에 머물렀는데 그제야 완주를 한다는 실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신체 회복 능력이라는 게 대단한 것 같다. 어떤 날은 숙소가 없어 33km가 넘게 걸었던 날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태였는데도 그다음 날 새벽 5시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게 되는 몸과 마음상태가 되어 참 신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긴장 상태여서, 아니면 두렵고 설레는 상태라 그런 것이었을까? 아마 한국에서라면 2-3일도 소화하지 못할 여정인데 31일 동안 끈기 있게 지속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은총이 아닌가 싶다. 물론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집사람 신발이 잘 맞지 않아 발가락이 엉망이었다.(결국 발톱 3개가 빠짐)
우리는 늘 제일 먼저 숙소를 나섰지만 거의 제일 늦게 다음 숙소에 도착을 하곤 했다. 대부분 다음 숙소 예약을 했기 때문에 선착순 공립알베를 가기 위해 경쟁하듯 빨리 걸어 일찍 도착할 필요가 없었지만, 천천히 걸으며 순례길을 충분히 음미하고 더불어 부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특히 내리막 길)였다.
돌아보면 그렇게 천천히 걸었던 것이 체력도 많이 소모하지 않고 와이프 발가락 외에 염려했던 무릎, 발목 등 부상을 당하지 않고 완주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순례 마지막 전날 밤은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와이프가 정상인도 쉽지 않은 800여 km를 아직 회복 중인 몸으로 쉼 없이 완수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25일 차에 순례길이 좋아 바바델로에 자리를 잡았다는 프랑스 부부의 알베르게에서 커뮤니티 저녁을 했었다. 미국, 캐나다,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쩌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순례길에 많이 오는지와 우리 부부에 대한 얘기로 모아졌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 순례자가 많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고, 여러 차례 병마와 싸우며, 특히 최근 2년 2번의 암수술 후 회복 중인 와이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맞은편에 앉아 내 말을 경청하며 공감하던 미국 여자 순례자가 와이프에게 말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이곳까지 온 것은 "까미노의 기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