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9)
순례자로서 하루일과는 단순했다. 대부분 새벽에 일어나 목적지까지 걷고 숙소에 도착해 휴식과 식사 후 다음날 순례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는 패턴의 반복이다. 처음 며칠은 걷는 것, 먹는 것, 불편한 잠자리에 적응을 못해 힘겹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에 숨겨진 행복한 순간들을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행복의 첫 시작은 일출이었다.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 30분 전에 출발을 했는데 31일 중 20여 일 일출을 볼 수 있었다.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프랑스순례길을 30분 정도 걸으면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등 뒤에서 주황색 일출이 시작된다. 매일 달라지는 풍경에 따라 다른 모습의 일출들이 행복세포를 함께 깨워주었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대자연의 풍경에 취하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눈으로만 담기 아까워 카메라를 켜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산과 들, 나무와 꽃들 그리고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이 어우러진 길을 걷고 있으면 어느새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떠다니곤 하였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도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길 위를 걷는 동안 또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커뮤니티 저녁을 함께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국적, 인종,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순례길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응원해 주는 모습에서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세상을 느꼈다.
성당에서 사색과 기도를 하며 마음의 양식을 채우곤 했다. 마을마다 하나 이상씩 자리한 성당 중 문이 열린 곳이 있으면 들러서 까미노에 올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힘겨웠던 시절의 나를 토닥이다 보면 가끔씩 가슴속 응어리들이 풀리는 카타리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어렵게 만나는 Bar에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때 소소한 행복이 밀려왔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탓에 10km 가까이 돼서야 만나는 문을 연 Bar에서 진한 카페 콘 라체 한 잔과 또르티에 아니면 달달한 초코크로와상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은 달콤하기만 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순례길에서 아침은 가볍게 먹고, 점심도 길 위에서 바게트나 과일 등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저녁은 직접 해 먹거나, 알베르게 오늘의 메뉴나 인근식당에서 먹는데 낮동안 소모된 에너지와 허기가 모든 음식을 꿀맛으로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매일 25km가 넘는 순례 후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 잔디가 깔린 정원의자 등에 편히 앉아 휴식을 할 때, 모든 일정을 마치고 불편한 이 층침대에라도 몸을 뉘 울 때 무사히 하루의 순례를 마쳤다는 안도감과 다음날 순례길의 설렘이 교차하며 행복이 밀려온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곳에서 하루 중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 내가 보내는 일상에서도 마주하는 순간들이라는 것이었다. 매일 뜨는 해를 볼 수 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멋진 풍경이 있는 곳에 갈 수도 있고,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진한 커피, 맛있는 저녁, 편안한 잠자리 등...
여행은 일상의 평온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들 한다. 파랑새 이야기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랬듯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매사에 감사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디에 있든 내가 마주하는 순간들, 하루들이 행복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