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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만큼 내어주는 까미노

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8)

by 뒤로 걷기

평소 무엇이든 꼼꼼하게 준비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순례는 그 취지에 맞춰 준비 없이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고 배워야 정신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별 준비를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와이프가 함께 가기로 한 후에야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경험자들의 조언 등을 듣고 준비를 시작했다.


마라톤 등 힘든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순례길을 단순히 걷는 것이라고 얕보았다가 부상 등을 당해 중도포기를 하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렵게 가게 된 만큼 순례 중 와이프 몸 상태가 나빠지거나 부상으로 멈추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체력이 안 돼 포기하지는 말자는 생각에 체계적으로 훈련을 계획했다.

20250422_073745.jpg 곳곳에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순례길

완주는 어렵지만 하루 20km 이상 걷는 순례길에서 체력이 가장 중요하기에 두 달 동안 와이프와 함께 걷기라는 운동종목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오로지 잘 걷기 위한 몸만들기를 했다. 근력운동과 오래 걷기, 순례를 며칠 앞두고는 각각 13kg, 9kg 배낭을 메고 12km, 15km와 24km를 실제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연습을 했다.

20250404_173514.jpg 순례길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실전 훈련(4.4, 세종 비학산)

또한 순례의 목적인 깨달음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할지 고민을 했다. 실제 그런 고민 없이 순례길을 완주 한 사람들이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순례를 마치면 뭔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자신들을 기대했는데 변화가 없어 실망했다거나 허무하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걷기만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순례를 마친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만 순례 후 아무 변화가 없는 나와 조우한다면 허탈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외형적으로 집중을 할 수 있는 여건 조성과 의식적 순례를 구상했다. 성당 등을 방문하고, 가능한 미사에 참석하고, 일정구간은 주제를 가지고 순례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순례길을 걸으며 열린 마을성당들에 들려 기도와 명상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얻고, 부활절 주간 로그로노 성당 순례자미사에 참석했고, 깔자다스 성당의 미사에 참석해서 신부님께 우리 부부만을 위한 순례축도를 받았고, 순례 마지막날 산티아고 대성당의 12시 일요미사에 참석했다.

20250420_143159.jpg 마을마다 열려있는 성당에 들러 감사기도와 명상
20250511_125347.jpg 산티아고 대성당 순례자를 위한 미사

또 대자연과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구름처럼 걷던 대부분 순례길과 달리 용서의 언덕 전 두 코스는 내게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시간을, 철의 십자가 전 두 코스는 그간 직장에서 책임자로서, 집에서 가장으로서 짊어졌던 힘들고 무거웠던 짐들을 내려놓는 의식을 치렀다.

20250414_133526.jpg 용서의 언덕
20250502_071703.jpg 철의 십자가

생각처럼 용서받고, 용서하고 또 마음의 짐들을 다 내려놓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마음속 어지러웠던 공간들이 조금은 정리되고 어깨도 어느 정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며칠의 순례코스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를 토닥여 주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구상을 했다.

20250419_111634.jpg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순례길

순례를 마치고 돌아보니 까미노는 내가 준비한 만큼 아니 그 이상 기꺼이 내어 준 것 같다. 그중 실전 같던 체력훈련은 31일 동안 순례를 건강하게 완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아직 회복 중인 와이프가 체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힘겨운 한계상황들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했던 것이 완주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한편, 의식적 순례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던 ‘흔들림 없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까미노에서의 감사가 습관이 되어 일상에서 매사에 감사하는 달라진 나를 만났다. 이번 순례만 해도 와이프가 여러 차례 병마를 잘 이겨낸 것, 함께 순례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어려운 완주를 해 낸 것 모두 감사한 일 아닌가.

20250511_101536.jpg 800여 km 순례의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선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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