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7)
31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살아온 환경도 생김새도 다른 처음 보는 사람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부엔까미노!라는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오래전 알았던 사람들처럼 친근함이 느껴지고 금세 친구가 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가까운 사람들과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희미한데 그곳에서는 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난 지 얼마 안 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고, 또 상대도 하기 쉽지 않았을 듯한 자신의 속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는데 까미노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이 출입문을 굳게 닫고 살뿐 아니라 마음의 문도 닫아놓고 타인이 접근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런데 순례길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오기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마음의 공간을 허락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성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제는 자기 성찰이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길로써 더 알려져 있고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그곳에 왔기에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들과 다르게 어렵지 않게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순례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국적과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진솔하게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시간을 가졌다.
비슷한 시기에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까미노에서 수시로 마주치게 된다. 길에서 만나서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면 반갑고, 또 같은 숙소에 있었던 순례자를 길에서 만나면 반갑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얼굴이 익숙해지면 안부인사에서 발전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려주다가 친구가 된다.
그렇게 순례길에서 만나 마음을 나누는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경우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랑의 결실을 맺었거나 진행 중인 커플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다 보니 사람의 정이나 사랑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쉽게 빠지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순례 중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온 한국인 커플, 까미노에서 만나 순례길이 좋아 알베르게를 차린 프랑스인 부부, 순례 다큐를 쓰고 있다는 네덜란드 작가와 미국인 연인, 몇 년 전 순례길에서 만나 평소 온라인으로 연락을 하다 휴가철에 순례길에 와서 만난다는 영국과 독일인 연인 등을 만났다.
여럿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플은 미국 연인이었다. 50대 중반의 여자는 몇 년 전 동생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 사춘기 여조카를 맡아 키우고 있고, 60대 중반의 남자는 상처를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손녀들을 돌보고 있는데 두 사람 다 힘든 시기였던 2년 전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를 위로해 주는 사이가 되었다 한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하기 힘든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커플을 순례 마지막날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는데 회복 중인 와이프가 건강하게 완주를 한 것을 본인들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순례를 마쳐 간편복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석양 속에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오늘 아침, 강아지와 산책 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주민에게 까미노에서처럼 미소와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건 침묵과 차가운 시선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평소 내 모습이었거늘 누구를 뭐라 하겠는가. 까미노에서 처럼 그저 마주치는 이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다 보면 언젠가는 메아리로 돌아올 날이 있지 않을까.
오늘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부엔까미노!라는 인사로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으리라.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사랑이 피어나는 그곳이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