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11)
여행을 좋아해 많은 곳을 다녔지만 늘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대부분 여행은 대도시나 잘 알려진 곳에서 눈도장 찍고 인증사진을 남기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진짜 여행은 작은 마을,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의 머묾이었다. 다양한 세상 속 현지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들어가 보통의 하루를 함께 해보고 싶었다.
은퇴 후 시골에 세컨드하우스를 외딴곳이 아닌 마을 안에 마련하고 싶은 이유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 작년에 경북상주 승곡마을이라는 낯선 곳에서 두 달 살아보기를 하며 가장 좋았던 시간은 그곳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일상을 체험하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다.
마찬가지로 외국에 가서도 작은 마을 등을 방문해서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우연히 작은 마을들에 머물게 되며 내가 원하던 여행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계기가 있었다. 최근 단체 순례객 등이 늘어나며 산티아고 순례길 숙소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며 예약이 안 되는 공립은 물론 편의시설이 많은 주요 도시 사립알베르게도 잠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9일 차에 큰 도시인 산토도밍고라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결국 7km 지난 작은 마을 Granon에 처음 머물게 되었다.
하루 25Km 정도를 걷다 보니 이후부터 주요 도시를 지나거나 못 미쳐 작은 마을에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예약이 용이하고, 붐비지도 않고, 거기에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풍경과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작은 마을에 머무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부터 가능하면 그런 곳을 선호하게 되었다.
작은 마을의 숙소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사립알베르게가 많은데 가족끼리 별채 또는 집안 별도의 방에 이층 침대 등을 마련해 순례객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잠자리를 제공하고 주변에 식당이 없어 주인이 직접 만든 메뉴 델 디아라는 순례자 커뮤니티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소규모 알베르게에 머물 때는 마치 시골집에 놀러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10여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 구경 후 잔디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주인이 직접 만든 집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내가 그동안 원했던 여행이 이런 것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너른 들판을 볼 수 있는 알베르게에서 주인과 순례자들이 함께 빠에야를 만들어 식사를 하고, 아타푸에르까에서는 친절한 자매가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는 한 순례자의 기타 연주를 듣고 주인이 직접 만든 스페인 가정식을 먹으며 순례자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모레티노스에서는 부부가 만든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자원봉사 중인 이탈리아에서 온 호스피탈레로의 순례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폰테캄비나에서는 우물, 곡식보관창고 오레오 등이 있는 전형적인 스페인풍 시골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알베르게에서 주인이 직접 키운 식재료로 만든 집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타베라벨라에서는 노부부가 할머니부터 전수받은 레시피로 만든 갈라시아 식 렌틸콩 수프를 먹으며 작년에 부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남편이 이제는 집안살림 모든 것을 도맡아 한다며 여성 순례자들에게 “Don’t give up!”이라는 농담을 하던 부부의 정겨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순례길을 다녀와서 설레는 꿈 하나가 생겼다. 언제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곳 작은 마을들로 다시 가서 이번에는 하룻밤 묵어가는 순례자가 아닌 호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로서 며칠 머물며 일상을 체험하고 각국의 순례자들과 로컬 와인을 마시며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났던 여행에서 내가 소망했던 여행을 발견하고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되어서인지 순례길을 준비할 때처럼 또다시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