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12)
오랜 직장생활 중 여러 차례 힘든 상황이 있었지만 7년 전 제대로 번아웃이 왔었다. 사심 가득한 상사 밑에서 내 소신과 다른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동안 힘들 때마다 내가 하는 일들은 정의롭고, 내게 가장 잘 맞는 일이라고 나를 회유하던 논리가 힘을 잃고 도무지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한계로 몰아갔다.
유난히 폭염이 심했던 그해 여름, 주말에도 본가로 못 가고 에어컨도 없는 세종집에서 열대야로 잠못이루며 지새운 어느 일요일, 집이 너무 덥기도 하고 다음날 중요한 보고도 있어 사무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는데 화면에 노란색 유채꽃이 핀 광활한 들판에 구불구불 난 길로 사람들이 걷고 있는 사진이 나타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방망이질 쳤다. 저 길을 걸으면 갈증도 가시고 방전된 에너지가 재충전될 것 같았다. 그날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 버킷리스트 최고 상단에 자리를 하게 되었고 시간이 날 때면 그곳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오랜 염원에도 불구하고 순례길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와이프가 내가 퇴직하던 2년 전 4월 암수술, 작년 1월 또 다른 암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간병을 하며 순례길은 내 버킷리스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던 올해 와이프 상태가 예상보다 좋아져 7년이 지나 드디어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것도 회복 중인 와이프와 함께...
4.11 그렇게 소망하던 순례를 시작하는 첫날 우여곡절 끝에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장엄한 일출을 보는 행운을 시작으로 5.11 마지막 날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해 대성당의 12시 미사에 참석하여 기대하지도 못했던 웅장한 보타푸메이로 향로 미사를 직관하는 행운을 누리는 것으로 순례의 대단원을 마치게 되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하루들을 행복으로 시작하게 해 준 일출들, 대자연의 풍경들, 마음의 양식을 채워 준 마을의 성당들, 허기를 달래주던 맛있는 음식들,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들, 정겨운 알베르게에서의 추억들.., 그리고 7년 전 처음 화면으로 보았던 아름다운 그곳을 직접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물론 어려움들도 많았다. 숙소가 없어 33km 넘게 걷기도 하고, 동키를 했던 백팩이 없어져 애를 태우기도 했고, 숙박할 곳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와이프가 발가락 부상으로 힘겨워하기도 했고, 일부 알베르게 시설 등이 너무 열악해 샤워는 물론 잠도 거의 들지 못하기도 했다.
또 이상 기온으로 컨디션 관리가 쉽지 않았고, 음식 등이 맞지 않거나 제때에 먹을 수 없어 평생 처음으로 몸무게가 4kg 이상 빠지기도 하는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오히려 그런 어려움들이 순례길의 풍성한 추억거리가 되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순례자들이 서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했던 일관된 대답은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는 것, 그리고 실제 순례길은 상상보다 경이로웠고, 까미노는 잊지 못할 많은 경험과 깨우침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좋았던 점은 대자연 속에서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며 용서받고, 용서하고, 절제하며 살았던 내게 영혼의 자유를 주고, 가슴 한편에 있던 마음의 상처들을 보듬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앞으로의 삶에 의미 있는 것들을 찾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까미노 위에서 또는 알베르게에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루어졌다. 국적도, 살아온 환경과 문화도 다르고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경청해 주고 내 일처럼 공감해 주는 사려 깊은 모습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31일 동안 800여 km 순례길을 걸으며 마치 짧은 인생을 한번 더 살아보는 기회를 가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전혀 다른 환경아래서 색다른 하루들을 지내며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좋은 사람들과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고, 가치 있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또 다른 삶의 31일로 기억될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자기 성찰을 위해서 걷든 종교적 이유로 걷든 모두 여행자가 아닌 '순례자'라고 부른다. 나도 여행자로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순례자로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성야고보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 중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습관처럼 되뇌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감사 습관이 돌아온 일상으로도 이어졌다. 와이프가 병마를 이겨내고 함께 순례길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어려운 상황들을 잘 극복하고 완주를 했다는 것도,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와 그곳을 추억할 수 있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 내게 순례길의 영감을 주었던 번아웃 상황조차도 감사한 일이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라는 제목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잘 알려진 곳이고 소개하는 멋진 영상과 좋은 글들이 많아 망설이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공유해 보고자 글을 써 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음에 담고 있는 분들께 작은 영감을 드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를 솔직하게 마주 보게 해 주고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그곳은 내 부족한 필력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실제 순례길 풍경 속 한 부분이 되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