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앤
이전 글에서 쳇 베이커의 1980년대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특히 1985년 전후 유럽에서의 작품 활동을 따라갔습니다. 평생에 걸쳐 베이커를 잡아당기며 전도유망한 쿨의 왕자를 몰락시킨 것은 마약이었습니다. 그 결과 1988년 5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호텔에서 추락사로 58세에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1950년대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베이커는 쿨 재즈와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대표하는 트럼피터와 보컬리스트로 부상하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보컬 재즈와 쿨 재즈를 대표하는 명연으로 재즈사에 기록됩니다만 이후 그의 삶은 비극적이었고 수많은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960년대 이후 30~40대인 베이커의 활동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20대였던 1950년대와 50대에 해당하는 1980년대는 그의 연주 커리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이커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20대 중후반 녹음한 우수의 트럼펫 연주와 노래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상징적인 작품이 바로 <Chet Baker Sings>인데 아래 앨범 포함 몇 차례 다른 버전으로 발매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베이커가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년 간의 활동은 주로 유럽에서 이루어졌고 유럽을 대표하는 음반사들을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역량과 에너지가 집중된 시점을 1985년 전후라고 할 수 있으며 이전 글에서 1985년 녹음한 작품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번 글은 베이커의 1985년 레코딩 중 스티플체이스에서 발표한 앨범 <Diane> 소개입니다. 1980년대 베이커의 작품은 편성에 있어 듀오, 트리오, 쿼텟, 퀸텟 등 다양한 라인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콤보 재즈(스몰 재즈)는 악기의 수가 늘어나면서 관악기(혼과 리드)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보다 호방하고 파워풀하며 풍성한 연주가 돋보입니다. 베이커의 트럼펫은 다른 트럼피터에 비해 음량이 크지 않고 열정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쿨 재즈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베이커의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듀오에서 퀸텟으로 확장되어도 트럼펫이 견지하는 소리가 있고 이 소리는 앨범 전체를 좌우하며 직관적으로 들립니다. 그의 연주가 다른 재즈 트럼펫 연주와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게다가 베이커가 견지하는 트럼펫 연주와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보컬은 참여 뮤지션들의 뛰어난 반주로 배가됩니다. 여기서 피아니스트 폴 블레이가 등장합니다.
폴 블레이는 포스트밥, 아방가르드 재즈, 프리 재즈 등에서 활동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입니다. 그는 재즈사의 주요 장르를 개척한 장인들(찰리 파커, 아트 블레이키, 소니 롤린즈, 벤 웹스터, 지미 지프리, 쳇 베이커, 찰리 밍거스, 오넷 콜맨, 돈 체리, 폴 모티앙, 게리 피콕, 팻 메스니, 자코 패스토리어스 등)과 협연하면서 자신의 피아노 스타일을 구축한 아티스트입니다. 그의 배우자였던 칼라 블레이(1936~2023)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작곡가로 명성을 쌓기 이전 이미 유명하였습니다.
쳇 베이커와 폴 블레이 듀오의 <Diane> 앨범 커버입니다. 블레이는 프리 혹은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연주를 지양하고 재즈 스탠더드 본연의 리듬과 멜로디에 집중하며 베이커의 트럼펫을 조력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일주일 전 타계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1931~2025)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보여준 슈베르트 가곡에서의 파트너십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앨범에 나타나는 블레이와 베이커의 관계가 바로 그러합니다.
연주 목록은 베이커의 장점을 십분 살릴 수 있는 스탠더드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2번 "You Go to My Head(나 마음을 휘젓는 당신)"는 베이커 말년을 대표할 수 있는 보컬 재즈입니다.
If I Should Lose You: 스탠더드
You Go to My Head: 스탠더드, 쳇 베이커 보컬
How Deep Is the Ocean?: 스탠더드
Pent-Up House: 스탠더드
Ev'ry Time We Say Goodbye: 스탠더드
Diane: 스탠더드
Skidadidlin': 쳇 베이커 오리지널
Little Girl Blue: 스탠더드
앨범명으로도 쓰인 6번 "Diane(다이앤)"은 누구일까요?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에르노 라피가 1927년 무성영화 <7th Heaven(일곱번째 천국)>을 위해 작곡한 "다이앤"은 영화 속 주인공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자넷 게이노가 연기하였습니다. 게이노는 이 영화로 제 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이커가 가리키는 다이앤은 따로 있습니다. 사진 속 다이앤 바브라는 베이커 말년의 삶을 지탱해주던 연인이자 재정적 지원을 한 인물입니다. 1987년 사진 작가 리샤르 뒤마가 프랑스 렌에서 찍었는데 57세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베이커 삶의 고단함과 질곡이 드러납니다. 그럼 이런 배경을 참조하여 베이커의 보컬과 연주를 따라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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