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대표적인 악기 색소폰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 중 알토와 테너 연주자들이 더 두드러집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고 지금은 전설이 된 연주자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테너 색소폰 거장들을 한 명씩 알아보고 이어서 알토 색소폰 명인들로 넘어갑니다.
다른 악기들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있지만 색소폰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내용이 더 길어집니다.
연주자별 글 구성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테너 색소폰: 콜맨 호킨스(1904~1969)
1920년대 뉴올리언즈.
재즈 연주자가 즉흥연주를 합니다.
그가 연주하는 악기는 무엇일까요?
이 당시 색소폰은 클라리넷, 트럼펫, 트롬본보다 재즈를 표현하는 측면에서 제 소리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색소폰이라는 악기는 미운 오리에 가까웠습니다. 이 악기가 우아한 백조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기여한 연주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콜맨 호킨스입니다.
풍부하고 감성적인 때로는 시끄러운 비브라토 연주로 테너 색소폰의 즉흥 연주를 발전시킨 그는 레스터 영, 벤 웹스터, 추 베리, 허슐 에반스, 돈 바이어스 등의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테너 색소폰은 재즈의 중요한 악기로 자리매김합니다.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출생: 미주리, 1901년 11월 21일
사망: 뉴욕, 1969년 5월 19일
호킨스는 아홉살 생일 선물로 색소폰을 선물 받습니다. 피아노와 첼로는 이미 터득한 상황. 16세에 캔자스 시티 시어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이후 색소폰 연주를 잘 하는 뮤지션이 되어 갑니다.
1923년 플레처 핸더슨 오케스트라에 발탁된 이후 그의 색소폰 솔로 연주는 괄목할 만했고 사치모의 트럼펫 연주와 기법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멜로디가 아닌 코드 전개에 대한 즉흥 연주에 중점을 두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 유럽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1939년 귀국한 호킨스는 Body and Soul을 녹음합니다. 이 곡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즉흥 연주의 명연주로 꼽힙니다. 1940년대에는 스윙 뮤지션인 테디 윌슨(피아노), 로이 엘드리지(트럼펫) 등과 연주하였고 1944년에는 디지 질레스피(트럼펫), 맥스 로치(드럼)와 비밥 녹음을 합니다. 1940~1950년대에는 Jazz at the Philhamonic(JATP, 재즈 엣 더 필하모닉) 콘서트에 참여하여 마일즈 데이비스(트럼펫), 패츠 나바로(트럼펫), 밀트 잭슨(비브라폰)과 협연하였으며 1948년 Picasso 솔로 연주에서 최고의 밥 테크닉을 선보입니다.
1950년대에는 레스터 영 그리고 후배 연주자들에게 밀리기 시작했으나 JATP 투어 및 젊은 뮤지션들과의 협연을 계속합니다. 1960년대에는 맨하탄의 빌리지 뱅가드에서 정기적인 연주를 하였고 듀크 엘링턴, 소니 롤린즈 등과 녹음을 합니다. 말년에 우울증과 폭음 등이 심해지면서 1969년 간질환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주요 녹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9 'Body and Soul'
1944 'with Dizzy Gillespie and Thelonious Monk'
1948 'Picasso'
1957 'Coleman Hawkins Encounters Ben Webster'
예전에는 LP를 모으느라 시간이 꽤 걸렸는데 이제는 대표 앨범을 모은 기획 세트가 많이 보입니다. 몇 세트 정도면 그의 작품을 접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호킨스의 별명은 Hawk(매) 혹은 Bean(콩)입니다. 그의 앨범 커버에 매가 간혹 등장합니다. 테너 색소폰의 풍부하고 농익은 사운드와 스타일을 발명한 호크. 몽크 등의 비밥 연주자들과 교분을 가진 스윙 연주자.
그는 여전히 창공을 나는 매 한 마리로 재즈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추천작: Body and Soul, 1996년 편집앨범
레스터 영(1909~1959)
레스터 영의 음악을 중요한 사건과 주요 곡을 중심으로 따라갑니다.
① 뉴올리언즈: 초기 그리고 가족 밴드
1909년 미시시피주 우드빌에서 태어난 영은 아기였을 때 뉴올리언즈 알제로 이주합니다. 음악 도시인 뉴올리언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영이 드럼을 첫 악기로 다루게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투어 밴드를 이끌고 있었고 영은 알토 색소폰으로 전향합니다. 1927년 18세. 원만하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관계로 밴드를 떠난 영은 이미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피아니스트 아드 브론손이 이끌던 보스토니언즈와 베이스 주자 월터 페이지가 이끈 블루 데블스에서 연주합니다. 당시 영의 우상은 C 멜로디 색소폰을 연주하던 프랭크 트럼바우어였습니다. C 멜로디 색소폰은 C 키를 중심으로 알토와 테너의 중간음을 내는데 영이 C 멜로디를 연습하다 보니 그의 테너 색소폰은 다른 테너 연주자들과 다르게 부드럽고 작게 들립니다. 그의 쿨 사운드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② 초기작들: 카운트 베이시와 조 존스
1933년 캔자스시티. 이곳에 정착한 영은 스윙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카운트 베이시 콤보에서 연주합니다. 1936년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 카운트 베이시(피아노), 월터 스미스(베이스), 칼 스미스(트럼펫), 조 존스(드럼), 지미 러싱(보컬)의 연주는 영을 알리는 계기가 되는데 이들의 대표곡은 “Lady Be Good”과 “Shoe Shine Boy”입니다.
③ 프레즈 & 레이디 데이
1930년대 초반. 레스터 영과 빌리 홀리데이.
소울 메이트로서 둘은 플라토닉 사랑을 통해 재즈 역사의 멋진 러브 스토리 주인공으로 남게 됩니다. 그 결과는 프레즈와 레이디 데이의 협연에서 친밀감과 존경심으로 나타납니다. 토니 윌슨의 피아노, 영의 부드러운 색소폰, 홀리데이의 진심어린 보컬이 “All of Me”, “A Sailboat in the Moonlight”, “This Year’s Kisses” 등의 명연을 만들었습니다.
홀리데이의 작품과 생애는 재즈북 2권의 재즈 보컬 20인 여성편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④ 카운트 베이시 & 그의 오케스트라
1930년대 후반 영은 카운트 베이시 콤보의 중요한 멤버였습니다. 이후 베이시는 빅밴드를 중심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영은 1940년대 후반 베이시 밴드를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플레처 핸더슨 오케스트라에 들어갑니다. 당시 테너 재즈의 리더격이었던 콜맨 호킨스가 떠난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영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의 외로움과 더불어 호크와 대별되는 프레스의 부드럽고 깃털같은 솔로를 밴드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3년 12월 베이시에게 돌아온 영은 빅밴드 구성으로 “Taxi War Dance”, “Jive at Five”, “Cherokee”, “When You’re Smiling”, “Pound Cake” 등의 초기 명연을 남기게 됩니다. 이로써 영의 연주가 다음과 같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찰리 파커, 스탄 게츠, 제리 멀리건, 폴 데스몬드, 소니 스티트, 주트 심스, 리 코니츠, 알 콘, 원 마시,
폴 퀴니쳇 등
⑤ 군복무
1944년. 영은 드러머 조 존스와 함께 LA에서 카운트 베이시 밴드와 활동하다가 같이 징집됩니다. 그의 나이 35세. 알코올, 마약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 수줍고 민감한 성격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는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글렌 밀러나 아티 쇼가 이끄는 백인 뮤지션 위주의 군대 밴드에서 영은 색소폰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사물함에서 발견된 술과 마리화나로 불명예 제대와 함께 1년간 군대 영창에 있게 된 영은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D.B. Blues(영창 블루스)”를 작곡합니다.
⑥ JATP
Jazz at the Philharmonic(JATP), 재즈 엣 더 필하모닉(필하모닉에서의 재즈 공연)
1944년 노만 그란츠가 기획하여 시작한 공연으로 재즈 역사의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영창에서 풀려난 다음 해인 1946년 영은 할리우드에서 열린 JATP에 솔로 연주자로 버드와 함께 초대됩니다. 버드에 영향을 준 프레즈, 이미 비밥을 정립하여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가 된 버드, 이 둘이 역사에 남을 연주를 하게 됩니다. 그 대표곡이 "Lady Be Good"입니다.
⑦ 트리오: 레스터 영, 냇 킹 콜, 버디 리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냇 킹 콜은 재즈 역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하이프니스트입니다. 즉 노래 잘 하는 피아니스트 혹은 피아노 잘 치는 보컬리스트가 아닌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위대한 재즈 싱어입니다. 이러한 콜이 드러머 버디 리치와 영의 트리오 멤버로 연주를 한다는 것이 의외일 수 있습니다. 콜은 이후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크룬 창법 싱어가 되고 리치는 자신의 빅밴드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됩니다. 콜이 재즈 중심에 피아노 연주와 보컬리스트에서 팝적인 싱어로 변시한 시점이 1950년입니다. 그의 재즈 작품은 이 시점 이전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진의 앨범도 그러하며 1946년 할리우드에서 녹음하였습니다.
⑧ 프레즈와 오스카 피터슨
1950년대 이후 영의 작품은 그의 초기 녹음에 비하여 낮게 평가가 되곤 합니다. 이는 알코올 중독 및 건강 문제에 기인하며 영의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의 녹음과 대비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연주는 여전히 아름답고 연륜이 묻어나는 폭넓은 감정 표현을 특징으로 합니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재즈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피아니스트인 오스카 피터슨은 1960년대 빌 에반스와 더불어 가장 훌륭한 트리오를 이끈 거장입니다. 또한 다른 뮤지션들과의 협연으로도 많은 명작을 만들었습니다. 프레즈가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와 만나 일련의 작품을 발표한 중요한 시점입니다.
⑨ 테디 윌슨과의 재결합
1955년. 신경쇠약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영은 치료를 통해 이듬해 연주 활동을 속개합니다. JATP을 기획한 노만 그란츠가 만든 재즈 레이블이 버브(Verve)입니다. 이 버브 레코드에서 피아니스트이자 밴드 리더인 테디 윌슨과 레스터 영이 <Pres and Teddy>라는 앨범을 녹음합니다. 베이스는 진 래미, 드럼은 조 존스(필리 조 존스와 구분하기 위해 파파 조 존스라고 부름). 수록곡 대부분은 미국을 대표하는 곡으로 영이 홀리데이와 20년 전 취입한 이후 동일한 콘셉트로 다시 시도하게 된 것이지요.
⑩ 말년
영의 알코올중독은 심해지고 건강은 계속 악화됩니다. 1959년 3월 15일.
파리 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영. 유럽 공연 중에도 음식보다는 술을 심하게 마셨던 그은 과음에 따른 내부 출혈로 귀국 몇 시간만에 사망합니다. 그이 나이 49세였습니다.
짧은 영의 삶 속에는 알코올, 마약과 같이 그를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요인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한편 인종 차별, 백인 아내를 둔 상황에서 받은 모멸감, 수줍고 민감한 성격 등은 정신적으로 그를 피폐하게 합니다. 이러한 내외적인 핸디캡을 안고 영은 1940년대 전후를 절정으로 당대 후배 색소폰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에게 영감을 준 거장으로 남게 됩니다. 납작한 돼지파이 모자(Pork Pie Hat)를 쓰고다녔던 영. 그 모자는 레스터 영의 시그니처이자 그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떠난 해에 찰스 밍거스가 "Goodbye Pork Pie Hat"를 작곡하여 영에게 헌정합니다.
추천작: The Lester Young Story, 2006년 편집앨범
핫불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