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내면에서 밖으로 나올 기회만 기다리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중략) 가끔 난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데, 나에게는 무엇인가 꼭 해야 할 중요한 말이 있고 그 말을 할 능력도 지녔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 또한 전혀 쓰지 못한다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주).
예전에 영화 '아일랜드'를 무척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칼렛 요한슨과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한 이 영화는 『멋진 신세계』의 '복제 인간' 모티프를 차용하여 제작되었는데, 그만큼 올더스 헉슬리의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대전쟁 이후 들어선 거대 정부가 모든 인간을 인공 수정으로 공장처럼 찍어내고,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지능과 신체를 결정지어 계급에 따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철저히 계획된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곳의 최고가치는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입니다. 사회적 불안정이 없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병을 앓지 않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모두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지키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혹시 변수가 생길 경우에도 '소마'라는 이름의 '행복을 주는 약' 있어, 그들에게 불행이 닥쳐오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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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과 안정을 누리는 듯 보이는 이 세계는 '유토피아'를 구현한 듯하나, 실상은 전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는 '역(逆) 유토피아'의 세계였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꿰뚫어 본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는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값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만족한 상태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멋진 투쟁의 찬란함도 없고, 유혹에 대한 저항 그리고 걱정이나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영원한 행복. 걱정도 불안도 근심도 고통도 없는 이상적인 세상. 그러나 세상은 빛과 어둠, 선과 악, 복과 화, 길고 짧음, 높음과 낮음, 앞과 뒤와 같이, 서로 극을 이루고 있는 사물이 하나의 짝이 되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양극단이 서로 존재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삶은 이런 원리를 이해하고, 어느 극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다독여서 잘 보내주는 일일 겁니다. 여기에서 멋진 투쟁의 찬란함이,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이, 유혹에 맞서는 숭고한 저항이 잉태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인생은 참 멋지기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기도 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가 그리는 세상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기도 합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멋진 신세계』에서는 강력한 권력이 사람들에게 동일한 삶을 강요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비슷한 삶을 갈구한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인들도 어쩌면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처럼 만족과 안정만을 추구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정된 직장과 수입, 내 집 마련, 은퇴 후 편안한 노후. 모두 이런 동일한 삶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낙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오늘날 세상을 보면 그런 삶이 실체 없는 그림자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생깁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걷는 길, 안정적이라 생각되는 길을 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리고 꼭 해야 할 것 같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 내면에서 밖으로 나올 기회만 기다리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느낌 말이지요.
저는 그것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궤도를 벗어나, 안정과 만족에 저항했습니다.
걱정, 근심, 절망하며 많이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줄기 빛을 찾았습니다.
저는 저의 삶이 멋진 투쟁의 찬란함으로 빛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제 내면에서 움츠려 있던 더 큰 무엇이 비상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갈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