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고인돌 공원, 송광사,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낙안 읍성
여행이 끝나면 스마트폰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가 금세 생각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의미 있는 여행의 흔적이나 훈장과 같은 것인데, 바꿔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에 길을 떠나 순천으로 향했다.
아침은 휴게소에서 에너지바와 초코바, 우유로 해결했고, 생각보다 든든했다. 순천 고인돌 공원 입장료가 현금결제밖에 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가족 입장객이 있어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천 원을 주셨다. 이것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주변에 현금을 구할 데가 마땅히 없어 부탁드린 것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세상에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송광사에 갔더니 여기도 현금결제밖에 안 된단다(2019년 여행 당시에는 사찰 입장료가 있었다).
카드 한 장 달랑 들고 여행을 나섰는데, 현금을 요구하는 곳이 너무 많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꽤 곤란해질 것 같다. 송광사는 현금영수증 발급이 안 된다는 안내 문구까지 써 부쳐 놨다. 세속의 방식을 되도록 지양하기 때문일까? 역시나 현금이 좋은 거겠지.
언짢은 마음에 의욕이 떨어졌지만, 법정 스님 얘기에 솔깃해졌다. 다른 분들은 잘 모르지만, 법정 스님의 책들은 한때 관심을 갖고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갔다. 무소유길을 따라가며 글귀들을 음미해 보았다. 후박나무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데, 내가 볼 때는 뭐 특별한 것이 없다. 특별한 사람의 눈에는 뭔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있는가 보다 했다.
조정래 문학관을 찾았다.
군부독재 시절,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올곧고 굳센 기상으로 싸웠던 투사를 만났다. 온갖 협박과 음해로 유서를 두 번이나 작성하고, 죽을 각오로 펜을 들었던 훌륭한 분이셨다. 하지만 우리와 똑같이 서글서글한 웃음과 평범한 얼굴, 몸집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진실을 향한 굳센 의지? 자신과 비슷한 생각으로 똑같이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진실은 때때로 외롭지만, 결코 벗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정래는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태백산맥 1부를 출간한 뒤, 후배로부터 석가모니 고행상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은 끔찍할 만큼 말라 온몸의 혈맥과 뼈가 그대로 드러난 청동상이었다. 태백산맥을 쓰고 심신이 피폐해져 있던 그는 이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몸이 저렇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는데 식당 아주머니께서, 낙안 온천이 그렇게 좋은데, 밤 9시까지 하니 천천히 가면 될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느긋하게 왔는데, 7시 30분까지만 한단다. 7시 30분이 다 되어 왔지만, 사장님이 직원들한테 말해둘 테니, 샤워만이라도 하고 나오라고 하신다.
고마운 마음에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해서 나왔다(여행하는 내내 찜질방이나 사우나에서 빨래를 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겠다).
낙안온천은 유황과 게르마늄, 탄산나트륨 등 다양한 광물질이 포함된 온천수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것은 타닌(타닌산, 혹은 탄닌산이라고도 불린다) 성분이 함유되어 있던 녹차탕이었는데, 지난번 선운산을 오를 때, 도솔천에서 보았던 ‘검은 물’에 들어있던 것이 바로 타닌이었기 때문이다.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은 타닌 성분 때문이지 오염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지갑을 캐비닛에 놓고 나온 것 같았다. 낙안읍성 주차장에 텐트를 치긴 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지갑이 보이지를 않는다. 제발 캐비닛에 온전하게 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불안한 마음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