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백련사, 고려청자 박물관, 시문학파 기념관, 무위사, 월남사터
어젯밤에는 러시아 여행객을 만났다.
자기를 소개하는데 러시아갱단이란다. 그런데 강간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고, 한국에 친구가 있어 여행을 왔단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통역 어플을 이용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상황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도리어 이것이 화를 불러왔다. 간식거리와 음료를 주면서 마음껏 먹으라고 하는 것까지는 고마웠는데, 먹지 못하는 술을 계속해서 권하는 것이 괴로웠다. 계속 거절하자 혼자서 병을 비우고, 한 병을 더 사 와서 마저 비우더니, 취해서 난동을 부리고 계속 잠을 못 자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술이 들어가니 본색이 나오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짐을 챙겨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새벽 한 시였다.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몸빼 바지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이 시멘트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액정이 온전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다.
아, 몸빼 바지!

정작 갈 데가 없어 다음 답사지인 다산 초당으로 무작정 향했다. 도착하니 천만다행으로 커다란 정자가 하나 있었다. 피곤함에 지쳐 정자 위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잠자리가 눅눅했다. 잠든 시간은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
새벽 여섯 시에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에 잠이 깼다. 부랴부랴 텐트를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세면을 한 뒤 다산초당을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 해가 뜨니 볕이 따가웠다. ‘뿌리길’을 지나 백련사 혜장 스님과 정약용 선생이 학문적으로 교류하던 정이 듬뿍 담긴 길을 걸었다.
그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서로에게 향했을까? 아마도 서로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즐겨 찾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 같은 길을 걸어도 걷는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튼 학문적으로 깊이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백련사에 올라 보니, 제법 큰 배롱나무 한 그루가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누마루에 올라앉아 땀을 식히고, 경관을 감상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백련사 주변은 온통 동백나무인데 꽃 천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쩌면 내가 앉아 있는 이곳에, 정약용과 혜장선사가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좋지 아니한가.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당했지만, 그 시간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고, 500여 권에 이르는 책과 함께 대작들을 쏟아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통달한 지식과 학문은, 오늘 우리에게 학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지금은 축적되어 온 지식의 양이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하여, 한 사람이 한 분야에 관련된 지식만을 전문적으로 습득하지만, 통합적인 지식과 견문, 그리고 무엇보다 인격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대를 살고 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통합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유배 기간 동안 아내가 느꼈을 절망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아내는 시집올 때 가져온 치마를 30년 동안 장롱 밑에 고이 간직하였다가 남편에게 보낸다. 자신의 병든 몸으로는 다시는 남편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이를 받아 본 정약용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하피첩’과 ‘매화병제도’는 그의 애절한 마음에서 태어난 것들이었다.
정약용이 이룬 학문적 성과가 너무 크기에 유배 생활마저 미화될 수 있을지 모르나, 사실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정약용의 가족을 향한 사랑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 그리고 부인 홍 씨의 눈물겨운 사랑과 헌신이었다.
김영랑을 비롯한 시문학파의 기념관에 갔을 때는, 솔직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보는 것마다 새로웠다. 무위사를 들러 월남사터로 향하는 도중, 엄청난 규모의 녹차 밭에 깜짝 놀랐다.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영향력이 ‘설록 다원’의 방대한 녹차밭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녁 식사 후 독천 교회 목사님이 방을 제공해 주셔서 ‘호텔 숙박’을 하게 되었다. 텐트에서 자는 게 여행의 묘미일지 모르나, 솔직히 말하면 방에서 자는 것이 훨씬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