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읍성, 고창 고인돌 공원, 람사르 습지
새벽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 텐트를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가 잠깐 오다 그치는 바람에 텐트는 무사했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 잠도 부족하고 피곤했다. 읍성 밖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수건을 적셔 땀으로 끈적해진 몸을 닦았다. 날이 너무 더워 하루 종일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녀야 했다.
모양 읍성을 여섯 시부터 돌기 시작했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옹성과 치, 총안 등을 눈으로 보고, 전통적인 성곽 건축기법과 성곽 건축 실명제를 직접 확인하였다. 성곽길을 한번 걸어보면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간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어젯밤에 야경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던 터라, 들어서자마자 성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답성놀이 안내 표지판이 보이는데, 옛 조상들이 즐겨했다는(?) 답성놀이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즐겨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성곽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 위를 걷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들은 성곽을 쌓느라 수고했으니, 아낙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튼튼히 밟아 성곽을 다진 것이 아니었을까?
'옹성'과 '치'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다.
'옹성'은 성문 밖을 반원형이나 'ㄷ'자로 감싸, 성문을 더욱 견고히 방어하던 발전된 형태의 방어 시설이고, '치'는 적을 관찰하고 포위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돌출시킨 것이다.
'총안'도 볼 수 있는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조선 시대에 조총이 유입된 것은 선조 시대 일이고,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들어 시험해 본 일은 있지만, 여전히 조선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인조가 조총 부대의 육성에 주력하여 명사수 부대를 편성하고, 명과 청이 격돌하는 금주성 전투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조선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면, 모양읍성이 단종 원년(1453년)에 세워졌거나, 숙종 때 완성되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총안은 쉽게 말하면 총을 쏘는 구멍인데, 단종 때는 조총이 유입되지도 않았을 때니 총안은 필요 없었을 것이고, 적어도 선조 이후, 조총의 위력을 확인하고 조총 부대를 육성했던 인조 이후에나 총안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숙종 때 완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아니면 단종 때 완성되었다가 숙종 때 성벽이 보완되었다거나. 아무튼 내 뇌피셜은 여기까지~
고대 이스라엘이 성벽을 쌓을 때, 직책과 가문에 따라 영역을 정해놓고, 구간별로 나누어 책임지고 쌓게 한 일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 모양새가 비슷비슷한가 보다. 사람이 사는 모양이 뭐 그리 다르겠나. 모양읍성도 성벽의 구간을 나누어 각 고을에게 맡겨 쌓게 하였는데, 자기의 구간만큼은 책임지고 쌓도록 만든 것이다. 성벽에는 마을 이름까지 표시해 두어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름과 마을의 명예가 달려있으니 똑 부러지게 일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성곽 건축 실명제는 한양도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덮개돌 무게만 300톤인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보고 싶은 마음에, 람사르 습지를 지나 홍보관까지 7km를 걸어갔다 왔다. 오늘도 족히 10km는 걸은 듯하다.
길을 걷다 보니 산림 감시원을 만났다. 운곡 저수지에서 잉어를 유심히 관찰하시면서, 나더러 와서 한번 보라고 하셨다.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니,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운곡 저수지를 만들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주민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천만 원 남짓한 돈을 보상금으로 받으면서, 전답을 다 팔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이주민이었던 감시원분도 그저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하실 뿐이었다.
동양 최대의 고인돌에 거의 도착하니 공원이 보였고, 벚나무가 수천 그루는 심겨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 옆에 잔디밭이 있는데, 이상하게 보이는 큰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소 검은빛을 띠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파리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커다란 고라니의 사체였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듯, 얼굴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져 멍하니 한참을 보았다.
동양 최대의 고인돌은 정말 거대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저걸 어떻게 옮겨왔을까? 고창의 고인돌은 수백 기에 이른다. 산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돌들이 모두 고인돌이고, 조금 떨어져 마을 안에 있는 것들도 있다. 고인돌의 크기는 300톤에 이르는 것부터 도저히 고인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작은 것까지 있다.
내가 볼 때, 당시의 공통된 무덤 양식이 고인돌이었고, 지도자든 평민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고인돌에 묻었던 것 같다. 평민들은 대부분 작은 돌들을 덮개석으로 사용하고 ‘개석식’으로 만들었을 듯하고, 지도자들의 권력의 크기나 지도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평가에 따라 덮개돌의 크기가 결정되어, ‘바둑판식’이나 ‘탁자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안내소에 계셨던 분의 설명도 이와 비슷했다. 고인돌의 덮개돌 크기만 봐도 청동기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수백 명밖에 안 되었다는 소린데, 이건 또 말이 안 된다. 많은 세월을 살아왔을 텐데, 이 정도의 사람들로는 300톤짜리 덮개돌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휴~ 학문의 길은 참 어렵다. 그나저나 벌써 해남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