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리 고인돌군, 수성당, 채석강, 내소사, 반계 유형원 유허지
7시에 일어나자마자 텐트를 철수하고 차에 옮겨 실었다.
하늘을 보니 당장에라도 비가 떨어질 것만 같다. 천만다행으로 일이 끝나자마자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단히 씻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는데, 한켠에 깨끗한 샤워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내친김에 샤워까지 한 후 길을 떠났다.
고인돌에 대한 학설이 여럿인데, 그중에는 고인돌이 청동기가 평등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 구암리 고인돌군을 찾았을 때 문득 이것이 떠올랐다.
덮개돌의 크기가 다를 뿐, 무덤의 크기는 비슷한 점이라던가, 부장품에도 별 차이가 없고, 수만 개에 달하는 고인돌이 있는데, 그만큼 큰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도 ‘이게 정말 고인돌인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작고 초라한 것들이 있었다.
학문은 객관을 추구하고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수성당에 갔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변산 해안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죽막동의 유구한 내력과 사연을 보면서, 수 만 년을 살아온 선조들이 저마다 생존이라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소망을 품고 치열하게 살아왔을 삶을 상상해 보았다. 아울러 죽막동을 빼앗기고, 점점 몰락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가야인들의 가엾은 운명도...
죽막동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 중에서도 가장 앞쪽으로 돌출된 지역이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삼국 시대에는 연안 항해나 근해 항해가 일반적이었는데, 죽막동은 서해안 남북을 잇는 중요한 해상 거점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과 왜의 교류 때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곳이었다. 대가야는 백제의 세력이 금강 이북까지 미치던 5세기 초까지는 육로로 죽막동까지 이동하여 중국과 교역했다. 그러나 백제가 5세기 후반 부안 일대를 확보하자, 섬진강을 새로운 무역로로 활용하여 중국과 교역한다. 그러다가 백제에게 섬진강마저 빼앗기고, 마침내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가까운 곳에 채석강이 있어 찾았다.
‘채석’이라는 말 때문에 막연하게 ‘돌을 캤던 곳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뭘 제대로 알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를 찾아보면, 그중에는 '채석'의 '채'가 '무늬 채(彩)로 되어있는 곳이 있고, '캘 채(採)'로 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면 '무늬 채(彩)'로 표기되어 있다. 지형의 모양새를 볼 때, 돌이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죽막을 경계로 북쪽이 적벽강, 남쪽이 채석강이다. 적벽강은 중국의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강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채석강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채석강과 비슷한 덕에 이름이 붙었다.
문득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말대로 우리 민족이 문화 강국이었으면, 적벽강과 채석강의 이름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김구 선생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전문가를 만나, 나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나무도 은행나무처럼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단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전나무 숲길이다.
대장금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내소사는 대웅전의 꽃 창살이 예술이다. 문마다 다른 꽃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조각과 문양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 있다. 수 백 년의 유구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각한 사람의 정성과 솜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문득 신기하게 느껴진다.
반계 유형원의 생가를 찾았다.
마루에 앉아 넓게 펼쳐진 산과 들을 바라보면서, 한 동안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중앙정부와 관제에 염증을 느껴 낙향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현실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학문을 연구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비롯한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겼으나, 반계수록 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유형원도 죽은 뒤 100년이 지나도록 묻혀 있다가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왕이었던 영조도 반계수록을 읽어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형원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면면이 이어져, 이익과 안정복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정약용에 이르러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자신의 생이 지속되는 동안 눈에 띄는 성과와 업적을 남기려는 것은 욕심이다. 다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사명이라면 사명인 것이다. 그 뒤의 일은 후배들이 감당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관리되지 않는 문화재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무덤은 글씨조차 희미해져 누구의 묘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지라 네 시가 조금 넘어 찜질방으로 직행했다. 찜질방은 죽염 고수가 운영하는 ‘힐링죽염캠프’다. 가격은 2천 원 비싸지만, 시설과 주인의 서비스가 무척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