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터와 박물관, 왕궁리터와 유적관, 고도리 석불입상, 쌍릉
왕궁리터 답사 시간은 가장 더울 때였다.
‘대서’로 전국에 폭염 주의보와 경보가 내려졌다. 그럼에도 종종 시원한 바람이 불어 선선하기까지 했다. 더운 날씨에 잔디를 깎는 어르신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점심은 어제 친절을 베풀어 주셨던 익산의 맛집 김여사님 댁에서 먹었다. 오전에는 미륵사터와 박물관을 보며 거의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왕궁리 유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서 무왕과 관련된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익산의 왕궁리 유적은 본래 왕궁터였다. 백제의 무왕이 왕궁을 건설한 것인데, 왜 사비(부여)가 아닌 익산에 왕궁을 건설한 것인지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한강 하류를 신라에게 빼앗긴 후, 후대 백제왕들의 염원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되었다. 무왕은 이를 위해 익산으로 천도하고 신라와 집요하게 전쟁을 치른다.”
그러나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다시 사비로 천도하고 익산 왕궁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왕궁사를 세운다.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시대 목탑이 파괴된 후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워 만들었다고 한다. 기단부는 통일신라 양식, 지붕은 백제 양식을 따르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나, 고려 전기의 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탑에서는 금제사리함과 사리병, 금제금강경 등이 발견되었는데, 금강경의 글씨는 백제 무왕 시대 초기(7c 초)의 것이다. 특히 금제금강경은 금에 대한 해박한 지식, 정교한 판각 솜씨, 고도의 서예 기술을 갖춘 사람이, 금으로 만들어진 종이 뒷면에 ‘상아’로 글씨를 새겨서 만들었는데, 금제 금강경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궁리터에는 재미있는 유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대형 화장실이다.
뭔 중요한 건물이라고 냄새나는 화장실을 유적으로 복원해 놓았을까? 그런데 이 화장실이 정말 중요한 건물이다.
화장실은 배수로를 따라 3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나무 기둥을 박아 공간을 나누고, 각 칸의 바닥에는 구덩이를 파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게 한 공동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규모도 크지만, 과학적이고 위생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화장실 내부의 오물이 일정한 높이까지 차오르면 수로를 통해 배출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대의 정화조 원리와 똑같다고 한다. 당시 백제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물 찌꺼기와 기생충알들이 발견되어, 당시 백제인들이 무엇을 먹고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니, 화장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참으로 중요한 유적인 셈이다.
오후에는 고도리 석불입상을 보면서 200m 남짓한 거리에서 서로 쳐다보게 만든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마을의 양 끝에 세워두어 마을을 지키라는 걸까?
쌍릉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한 것 같았으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안에 왔을 때, 고추밭에 약을 주시는 할머니 한 분을 보게 되었다.
굽은 허리에 모자 하나 쓰시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약을 뿌리시는데, 약이 바람에 날려 땀인지 약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약 줄을 끌었다 놓았다 하면서 도와주고 계셨는데,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분들인데, 세상은 저런 분들을 가장 하찮은 존재로 취급한다. 그리고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없으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인생을 소비한다. '순리'와 '역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따져 들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정도는 가졌으면 한다. 사람마다 마음의 소리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잠은 처음으로 텐트를 치고 스포츠 공원 잔디에서 잤다. 진짜 여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원한 바람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풀벌레 소리와 공원의 은은한 조명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행복한 마음에 미련스레 웃음이 계속 나왔다.
오후에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쌍릉에서 부안으로 가는 길에, 비둘기처럼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산길 한가운데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차가 가까이 가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길래, 차를 약간 비껴 세워놓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두 손으로 새를 안는데도 도망을 가기는커녕 손 위에 올라앉는다.
"호~ 이놈 봐라."
혹시 다친 곳이 있어서 날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이리저리 잘 살펴봤지만 상처 입은 곳은 없는 듯했다. 길 한쪽에 놓아주려 하니 후드둑 날아올라 나무에 올라앉는다.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닦인 길이라, 사람과 차가 종종 지나다녔을 법도 한데, 전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새란 말인가? 아니면, 사람에게 길이라도 들여졌던 건가? 여행의 묘미가 이런 특별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토실토실하니 귀여운 놈을 손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데도 날아가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