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지, 무량사, 대조사, 관촉사
성주사지를 갈까 말까 고민했다.
대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면 동선의 낭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것에도 수준이 있다는데, 고수는 폐사지를 찾아간단다. 이왕 답사하는 거 고수 흉내라도 내볼 심산으로 찾았는데, 찾은 만큼 보람이 있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쬐었지만, 폐사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가람배치와 기단, 석탑, 탑비, 민불까지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성주사가 통일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성주산문의 중심지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낭혜화상의 삶은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습득하고 20여 년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 ‘동방대보살’이라 일컬었다.”
무량사 입장료는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일주문 밖 식당에서 밥을 먹고 현금을 마련해 들어갔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식당을 찾았는데, ‘올방개묵’이라는 색다른 음식이 있어 먹어 보았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면...글쎄, 색다른 맛?^^;
무량사 극락전은 2층 팔작지붕을 올린 멋있는 건물이었다. 사방에 활주를 둘렀고, 2층 지붕에도 활주를 세웠다. 안쪽은 하나로 뚫려있어 높이 솟은 천장과 무늬가 멋이 있다. 5층석탑은 기단이 하나, 몸돌과 지붕돌이 5개인 5층 석탑이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고 있고, 처마 부분이 위로 솟구쳐 있는데, 이것을 보면 백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양식과 백제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이라고 한다.
생육신 김시습이 방랑을 하다가 스님이 되어,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적이 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이 무량사인 줄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법명은 ‘설잠’이었다.
가까운 곳에 문화유산 답사의 대부 유홍준 교수님의 별채가 있는데, 한번 뵙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해서 반교리를 찾았다. 주말에만 내려오시는지라 오늘은 안 계셨다. ‘휴휴당(休休堂)’ 마루에 인사말과 함께 메모를 남겨놓고 길을 떠났다.
장하리 3층석탑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늘씬한 몸매의 탑신과 얇고 평평하니 하늘로 솟구치듯 처마 끝이 올라간 모양새는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와 관촉사의 미륵상은 정말 괴상하게 생겼다. 몸의 비례가 맞지 않고, 얼굴도 기묘하게 생긴 데다, 머리 위에 네모나고 기다랗게 올라앉은 관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괴이하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민중들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한,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불상 양식으로 의미가 있어 카메라에 고이 담아왔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석굴암 불상의 ‘조화’와 이상미, 완벽한 ‘질서’는 중앙정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불교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상과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같은 괴이하고 파격적인 모습은 질서를 파괴하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 중앙정치 체제에서 벗어나 지방 중심으로 힘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익산의 ‘김여사 맛집’은 6천 원 가격에 맛있는 반찬과 수박까지 간식으로 준다. 익산의 인심 김 여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