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유적지, 선운사, 고창 고인돌 공원
아침 일찍 백산을 찾았다.
어르신께 길을 묻자, 백산 ‘성지’를 찾는 것이냐고 물으셨다. 마을 분들에게 백산은 성지였다. 전북 문화재 관리팀 분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예초기를 돌리고 계셨다. 우리가 누리는 문화의 풍성함 뒤에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땀과 수고가 있다.
황토현 기념관에서 두 분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민족은 좀 살만하면 움직이지 않다가, 모두 궁지에 몰리면 그제야 움직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일이 그렇다."
글쎄.
이것은 비단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사람의 속성이 원래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지구 환경에 대한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살만하니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꾸는 데는 돈이 많이 들고, 당장 감수해야 할 피해와 희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일반 서민들도 당장의 편의를 위해 습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인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나온다. 문화유산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본받기 위함이 아닐까?
솔직히 무장봉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행한 일들이 겹칠 때면, 비폭력이고 나발이고 힘이 최고라는 생각에 지배되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농민들이 당했던 가혹한 수탈과 폭정, 고통과 절망에 절어 지내는 삶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왜 폭력을 사용해야만 했느냐고 따진다면, 나는 그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칠 것만 같다.
감히 다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 죽음을 마주하면서, 어찌 세 치 밖에 되지 않는 혀로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것일까?
국립국어원 사전을 찾아보니 혁명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동학농민운동이 혁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낡은 봉건체제를 부수고, 근본적으로 나라의 체질을 바꾸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뜻과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탐관오리의 숙청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노비 해방, 토지 재분배, 농민군에 참정권 부여, 일제의 배격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일제와 청, 특히 일제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졌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제가 우리 민족을 구해냈다는 망언을 누가 하는 것인지. 오히려 무너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스스로 떨쳐 일어난 나라의 백성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은 일제의 총칼과 군홧발이었다.
서정주의 시문학관은 닫혀 있어 생가만 보고 왔다. 선운사에 가는 길은 멀지 않았으나, 도솔암에 오르는 길은 아름다웠지만 무척이나 힘들었다. 오르는 길에 진흥왕이 머물렀다는 진흥굴과 600년 된 장사송, 마애불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많이 걸었다. 선운산에 오르고, 고인돌 공원을 둘러본다고 나선 것이, 못해도 10km는 족히 걸은 듯하다. 고창에는 24시간 찜질방이 없는 것 같았다. 하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은 동선의 반대쪽에 자리 잡고 있어 가기가 곤란했다. 고인돌 공원으로 오지 말고 곧장 찜질방으로 갈 걸 그랬나 후회를 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고창 고인돌 공원은 너무 넓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고인돌 공원은 6개의 코스가 있는 데다, 람사르 습지와 동양 최대의 고인돌까지 고려하면 7개 이상의 코스가 있다. 오늘은 그냥 4개의 코스만 돌고 나머지는 내일 보기로 했다.
사우나에서 몸을 씻은 뒤 모양 읍성(고창 읍성) 주차장에 텐트를 쳤다. 모양 읍성의 야경은 참 아름다웠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야경을 볼까 생각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 포기했다.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