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영당, 배론성지, 의림지, 장락동 7층 모전석탑, 청풍 문화재단지
아침을 먹고 제천으로 향했다.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유중교가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세웠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이곳에서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기도 했다. 유중교는 이항로와 김평묵의 제자로 위정척사론자이면서 동시에 의병장으로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구한말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활로를 찾고 있던 시기, 개화파는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상과 제도로 나라를 개혁하려 하였고,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침략 야욕을 드러냈을 때는, 서로 사상이 달라도 한마음으로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다.
안내문을 보면, “이곳은 위대한 교육자인 류중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요, 류인석이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봉기를 논의한 곳이며, 그들의 역사의식을 담은 목판이 전하는 곳이며, 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자양영당이 세워진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론 성지에 와서는 ‘황사영 백서사건’을 생각하면서 복잡한 심정이었다.
죽음의 극심한 공포 속에서, 그가 천주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이었을까? 동료가 옆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론 천주를 믿는 신앙이, 지금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보다 피안의 세상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이웃과 민족이라기보다, 천주를 믿고 구원받은 한 사람, 그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도 그렇거니와, 신앙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다. 황사영은 순수한 신앙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세상사를 바라보는 넓은 시각과 신앙의 깊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유학이 흥하면 사학은 자멸할 것’이라고 믿고 천주교를 박해하지 않았는데, 정조를 보좌하던 실권자 채제공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세력이 바뀌면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과 정약종 등 3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황사영은 이곳 배론으로 피신하여 토굴에 몸을 숨기고,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자 하였다.
백서의 내용은 교회의 사정과 박해에 대한 간단한 설명,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 과정,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그의 죽음, 그리고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언급 등이다. 이 내용을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에다 총 122행, 도합 13,384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로 하여금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백서도 발각되었다.
문제는 백서의 내용 중에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부분이었다. 여기에는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과 더 나아가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 내용 출처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남인 및 노론 시파만 무력화하고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천주교가 외세를 끌어들이는 반역자들이라는 인식이 박혀, 신앙의 자유는커녕 오히려 거세게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황사영은 당시 국제 정세에 관해 어두웠던 것 같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며 탐욕스럽게 팽창하는 형국과, 종교가 제국의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신앙을 위해서는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시각과 신앙을 위한 군사적 개입까지 정당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등은 신앙인으로서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삼한시대에 축조되어 농경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준 의림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으로 향했다. 기단이 하나라는데, 그냥 돌 한 칸 높이의 기단이다.
청풍문화재단지로 넘어가는 길은 정말 멋이 있었다. 중간중간 볼 곳이 너무 많아 천천히 가서 그랬을까, 문화재 단지에 10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읽지는 못해도 한벽루의 기문만은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일찍 단양으로 넘어와 저녁을 먹고, 남한강 변에서 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했다. 찜질방에 사람이 없으니 허전하다. 코를 고는 사람이 있어도 북적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그런 게 사람 사는 맛이려나.
장락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절로 17세기경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안내문에 따르면, 제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불교 유적이라는 점과 연화문 수막새, 새끼 줄무늬 및 직선문이 새겨진 기와 등은 세작 시기가 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고 있어, 고대의 문화 전파 경로와 제천 지역의 고대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모전석탑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었는데 탑신에 비해 너무 얇아 있는지 모를 정도다. 탑신과 지붕돌 모두 점판암으로 만들어졌는데, 1층 탑신 부분에 화강암으로 만든 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한벽루.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이 세워져 읍내가 수몰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본채 옆에 작은 부속 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한벽루에는 태종 대의 명재상 하륜의 <한벽루기>가 걸려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정자를 세우는 일은 한 고을의 수령 된 자의 마지막 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되고 못 됨은 세상의 도리와 관계가 깊은 것이니, 하나의 누정이 제대로 세워졌는가, 쓰러졌는가를 보면 그 고을이 편안한가, 곤궁한가를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실태를 보면 세상이 도덕이 일어나는가, 기우는가를 알 수 있을지니, 어찌 그것이 하찮은 일이겠는가?”
- 내용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정자 하나를 세우면서도 도리를 생각하고,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정치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충주호와 청풍문화재단지. 이곳은 3차 여행을 하면서 다시 찾았다. 청풍은 많은 문화 유적이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마을과 함께 문화재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충북도청은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