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암, 단양적성, 단양 적성비, 사인암, 도담삼봉, 온달산성 등
아침 7시 30분, 먼저 하선암으로 향했다.
하선암에도 어김없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승이라는 곳을 찾을 때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던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왜 저렇게 이름을 새기는 걸까?
돌에 이름을 새기면 돌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일까? 이 세상과는 다른 어떤 별천지에 온 것만 같아,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곳을 찾아왔을 때, 자기가 먼저 왔었노라고 거들먹거릴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름이라도 새겨, 그 세계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영원하지 못한 인간 존재의 한계가 그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 보다.
일면 측은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 시를 지어 새긴 것은 그나마 이해할 만하다. 지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에 보내는 영광의 송가일 테니. 그러면 돌이 아닌 대나무에 이름을 새기는 사람들은 또 무슨 심보일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수승대는 수많은 이름과 글귀들이 거북 바위 전체를 뒤덮고 있다. 거북 바위를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것이 더 아름다웠을까? 이름을 새기고 글귀를 새긴다는 것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자연의 온갖 조화로 만들어진 작품을 변형시키고 훼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새겨진 이름과 글귀들이, 얼마나 많은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들의 사연을 담고 있을지 생각하면, 추하기보다는 아련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스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버거운 인생길을 걸어가느라 버둥거리며 살아왔을 그들의 삶을 생각하니,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영원과 지고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숭고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선암은 단양 8경 중 하나로, 상선암, 중선암과 함께 삼선암으로 불린다. 하선암은 수백 척이나 되는 흰 바위가 마당을 이루고, 그 위에 커다란 암석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옛사람들은 그 형상이 미륵 같아 보인다고 해서 '불암'이라고 불렀다 한다.
부슬비를 맞으며 단양적성에 올랐다.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를 몰아내고, 단양을 차지한 것을 기념하여 적성비를 세우고 산성을 건설했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돌들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빛이 나는 듯했다. 테뫼식 산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그렇듯 장관이다.
단양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였던 이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비석의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는데,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비는 순수비(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단양적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으로 북서쪽은 경사가 급하고, 남동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성벽은 기초 부분을 돌과 진흙으로 다져 단단히 하였고, 성의 외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다. 성의 안쪽은 말을 타고 병사가 다닐 수 있게 평평하게 다져 쌓았다. 성을 쌓는 방법이 매우 견고하여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단양향교는 수리 중이라 들어가지 못하였고, 바로 사인암으로 향했다.
사인암은 고려 후기 유학자인 우 탁 선생이 지냈던 사인이라는 벼슬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안내문에는
“선생이 감찰규정에 있을 때 충선왕의 비행에 대해서 도끼를 둘러메고 상소를 올린 이른바 ‘지부상소’의 이야기는 사인암 석벽과 같이 우뚝한 선생의 기개를 잘 말해준다.”라는 구절이 있다.
역사스페셜을 통해 알게 된 충선왕은, 비록 고려에 머물면서 다스리지는 못했으나, 고려 백성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선왕이었다. 역사적 평가는 늘 그렇듯 해석자의 손에 달려있긴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거나 속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이 큰 바위덩어리를 누가 칼로 썰어놓았을까? 참 반듯하게도 잘라놓았다. 바위의 색깔도 마치 옅은 파스텔로 칠해 놓은 것 같은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작품이 바래고 고풍스러운 멋이 나듯, 사인암도 오래 전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만 같다.
도담 삼봉의 안내문을 보았는데, 정도전의 호가 이곳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는 정도전의 호가 ‘삼각산’에서 따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어떤 것이 맞는지 아리송하다. 비슷하게 온달산성 안내문에는 고구려 평강왕 때 온달장군이 쌓은 성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유홍준 교수는 온달산성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어, 단양적성과 마찬가지로 신라가 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장미산성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온달산성의 안내문을 보면,
“고구려 평원왕 때 온달장군이 신라군을 막기 위해 남한강을 굽어보는 요새 지경에 쌓은 성으로 성의 축조 방법은 퇴뫼식 내외협축으로 견고하게 축조된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남문과 북문에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성이 있으며…”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설명을 보면,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치와 옹성이 고구려의 독창적인 축성법이기는 하나, 당시 삼국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축성법만 가지고 고구려의 산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다.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워지고, 다양한 이야기들과 소위 말하는 ‘썰’이 많다 보니, 듣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소개해주는 그것을 진실로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공신력 있는 단체가 확실한 정보를 보장해 주지 않는 이상, 일반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사실 그대로 공개하여, 정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적인 이해득실을 떠나서, 문화유산을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하여, 올바른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빠르고 광범위하게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정보의 진위를 가려내는 작업이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가짜 뉴스가 활개 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이 가진 이러한 맹점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진실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단체가 있다면 상황이 나아질까? 적어도 양심적이고, 언제든 대화의 여지를 남겨놓는 포용력 있는 기관이라면 그럴 것 같다.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이리저리 헤매다 15분 늦게 청령포에 도착했다.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강 건너에서 바라만 봐야 했다. 청풍문화재단지도 그렇고, 청령포도 그렇고, 10분 남짓 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