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리 마애불상군, 목계나루터, 장미산성, 중원고구려비, 중앙탑, 탄금대
어제는 몹시 피곤하여 충주와 제천 일정만 짜다 잠이 들었다.
11시에 잠들었지만 8시가 되어서야 깼다. 그래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 9시까지 잠을 잤다. 아침으로 빵과 계란, 토마토와 딸기잼, 그리고 이름 모를 잼을 함께 먹었는데, 그제야 눈이 떠졌다. 출발 준비는 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렀다. 12시가 넘어 점심까지 먹고, 2시가 돼서야 출발했다. 수많은 대화 속에서 답답한 것들이 풀리지 않고 질문으로 남겨졌다.
마애불상군은 보아도 제대로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작품이라는데 보살상의 갸름한 얼굴만 보일 뿐,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전문가나 되어야 보이는가 보다 했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 보면, 커다란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군을 발견할 수 있다. 불상군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남한강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강변을 따라 불교문화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귀중한 것은 알겠는데, 당최 보이질 않으니 이거 원~.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현장 안내문은 "여래상의 당당한 어깨와 가슴, 손 모양, 두꺼운 옷주름 그리고 공양상의 고리장식과 허리띠 처리 등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며, 특히 팽이모양의 대좌나 보살상의 갸름한 얼굴은 고구려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설명을 보면 "고구려 불상의 착의법과 형식을 따르고 따르고 있는 점들을 통해서 고구려 불상의 영향에서 신라시대 불상의 흐름을 함께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라고 되어 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그것은 그렇다 치고,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있나.
목계나루터의 안내문은 전부 지워져 읽을 수가 없다. 대신 목계주민들이 만든 석비를 읽고, 대충 나루터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목계나루터는 내륙에서 모인 물자가 한강 뱃길을 따라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곳이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목계나루터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써 놓았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소나무를 싣고 내려온 뗏목이 고된 노를 멈추고, 서해안에서 올라온 젓갈 항아리가 신바람 난 아낙들에 둘러싸여 뚜껑을 열던 곳, 우시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배에 실려 구슬픈 울음을 내던 곳, 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과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의 벅찬 만남이 있고, 뜨내기 방물장수와 부끄럼 많은 처녀의 무심한 이별도 있었으리라.”
중원 고구려비로 향하는 도중에 장미산성이 있어 들렀다.
충주 지역이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던 장소이니만큼, 산성에서는 삼국의 유물이 골고루 발견된다. 그래서 누가 처음으로 산성을 지었는지 알기 어려운 것일까? 안내문은 고구려에서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백제가 쌓은 성이라고도 되어 있고,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고 말하는 곳도 있었다. 문화재청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 소리인지 알지 못하겠다. 다 그럴듯한 근거로 말하고 있으니, 모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긴 가짜 뉴스도 그럴듯한 근거를 대면서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는가.
정직하게 연구하고 소신 있게 말하는 것은, 특별한 계기로 진위가 가려지지 않는 이상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겠지만, 처음부터 기만할 생각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악질적인 행위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반목과 대립, 갈등은 사회를 끝 모를 미움과 분노로 물들이고 병들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악이란 선의 결핍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성인의 말이라 쉽게 비판할 일은 아니겠으나, 나의 하찮은 수준에서는 고상한 말장난처럼 들린다. 악이란 것이 이처럼 거대한 실체를 가지고 세상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선의 결핍이라니. 악도 위대한 성인의 거룩한 눈빛 앞에서는 그 실체가 해체되는가 보다.
중원고구려비는 전시관이 따로 있어 월요일에는 휴관이다.
중앙탑에 와서는 통일신라시대 유일한 칠 층 석탑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석탑양식은 다를 게 없었고, 다만 칠 층이라는 것과 탑 넓이에 비해 급격하게 높아지는 체감률을 가지고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탄금대에서는 나라를 잃고 신라의 신하가 되어 가야금을 타야 했던 우륵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았던 신립 장군과 8천 명 결사대의 숭고한 죽음을 생각하며, 나라가 분열될 지경에 이른 작금의 현실을 생각했다. 사람 중에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탄금대는 해발 108m 정도의 야트막한 산에 위치하며,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합수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3대 악성 중 한 명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란 명칭이 붙었고,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맞서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한 곳이기도 하다.
신립은 당시 북방에서 용맹을 떨치던 장수로, 조정에서 볼 때 나라를 지킬만한 믿음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삼도순변사로 임명받은 신립은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아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충주로 내려왔다. 종사관으로 있던 김여물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오늘날의 문경새재)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덕분에 손쉽게 조령을 넘은 왜군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당황한 신립이 충주성으로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정비되기도 전에 왜군이 출격하여,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부장 김여물과 함께 탄금대에서 적병 수십 명을 죽인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 있는데, 왜군은 험한 지형(조령)을 거쳐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매우 불안해했고, 몇 번씩이나 척후병을 보내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키는 병사가 없음을 알게 되자 신이 나서 지나왔다고 한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위령탑을 보면서도 마냥 흠모하는 마음으로 추모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과 됨됨이가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데, 북방에서 용맹을 떨치고 사람들이 우러러봐 주니, 기세등등하여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평야에서 싸우던 방식 그대로 싸우려 하다가, 수많은 충주성의 백성들이 죽고, 나라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손쉽게 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