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실마을, 석천정사, 북지리 마애불, 부석사, 소수서원, 성혈사 등
잠이 든 지 세 시간 만에 깼다.
엄청난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에서 깨어 구시렁대거나 뒤척이고 있었다. '저러다 코가 터지는 건 아닐까?'
두 시간이 넘도록 뒤척이다, 차라리 일찍 일어나서 영주를 모두 돌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 임청각을 건너뛰고 바로 닭실마을로 향했다. 충재 권벌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암정은 사람들이 하도 무절제하게 다뤄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회마을에서도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불이 나서 출입을 금지한 곳이 있었는데, 그 심정 십분 이해가 갔다. 정자에 올라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닭실 마을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풍수지리상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여 ‘금계포란’이라 하고, 최고의 길지로 치는 곳이란다. 청암정은 권벌 선생의 종가 옆에 있던 거북바위 위에 세워졌는데, 정자 둘레로 물이 흐르고, 나무와 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산골짜기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문헌에 의하면, 청암정은 1526년 권벌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이곳에 정착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권벌 선생은 1533년 복직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하여 다시 파직되었고,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기묘사화 때는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 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화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시대를 탓해야 할까, 사람을 탓해야 할까? 언제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옛 현인들의 말처럼, 시대가 험하면 몸을 낮춰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석천정사에 왔을 때, 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계곡물에서 낚시를 하고 계셨다. 출입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었지만, 계곡을 따라 석축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올라앉은 건물들이, 자연과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자꾸 낚시하는 분들이 앵글에 들어왔다.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퍼뜩 성주 왕버들 숲에서 들었던 사진 동호회분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진에는 주재와 부재가 있다.”
이내 생각을 접고, 나무와 계곡, 사람과 건물을 함께 넣어 사진을 찍었다.
북지리 마애불을 보고 오록마을에 갔다. 오록마을에도 문화재로 보이는 곳이 몇몇 있었는데, 관리가 안 돼 풀이 무성했고, 건물엔 쥐똥이 가득했다.
부석사는 많은 기대를 하고 갔는데, 주말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봉정사에서 느꼈던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위고, 아래고, 옆이고, 사방에서 해설사들이 스피커로 설명하는 소리, 단체로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량수전과 부석, 석등, 선비화를 보고, 무량수전을 향해 정연하게 배치된 가람을 보기는 하였으나, 붕 뜬 마음과 공허한 눈으로 보았으니, 제대로 봤을 리가 없다. 다음에 다시 와서 제대로 봐야 할 것 같다.
봉화군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새긴 것이라 한다. 7세기 후반 신라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과 함께 이 시기 영주, 봉화 일대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지어졌고, 공민왕 7년(1358년)에 불에 탔다. 지금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였다. 건물은 배흘림 양식의 기둥과 그 위에 공포를 하나 얹은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졌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손꼽힌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가장 잘 지은 고건축 1위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꼽았다.
소수서원은 4년 전에도 왔었지만, 그곳이 소수서원인지도 모르고 왔었나 보다. 주차장에 들어서 보니 그제야 기억이 난다. 미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살펴보았다.
천연기념물 갈참나무를 보고 성혈사로 향했다.
여섯 시가 다 된 시간, 한참 동안 산길을 차로 올라 도착했다. 스님 한 분이 가파른 경사길을 내려오시면서 너그러운 웃음으로 맞아주신다. 시원한 바람이 산사에 불었다.
사찰에 탁 트인 경관을 볼 수 있는 누마루가 있어, 앉아서 경치도 즐기고 바람을 맞으며 피로도 풀었다. 대웅전에는 봉정사 대웅전과 같이 툇마루가 있고, 나한전에는 내소사의 꽃창살만큼이나 아름다운 창살이 있다. 대웅전의 뒤편 산 위에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름은 ‘만지송’이라 한다. 특이하게도 땅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 뻗어 나와 이름을 만지송이라 부른다.
고즈넉한 산사의 저녁을 맛볼 수 있어서, 부석사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영주 시내로 다시 돌아와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암각화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 영주에도 24시 찜질방이 있다.
‘영주스포렉스’, 니가 있어 고맙다.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공부에 전념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소수 서원은 서원의 시초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3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했고,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조정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소수’라는 이름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었다. 사액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의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데, 동시에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액 서원이 점점 늘어나는데, 결국 사액 서원은 나라의 골칫거리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