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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와 나

by Eun

어느 집 낮은 지붕 위로 능소화가 피었다. 흐드러지다 못해 벽으로 줄기를 늘어뜨리고 그 줄기에도 능소화 소담한 꽃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능소화는 덩굴식물이다. 곧게 자라지 못하고 의지해 살아가는 식물이지만, 하나의 뿌리에도 여러 갈래의 줄기를 내어 결국엔 마당 옆 담장을 다 덮어버리는 꽃나무다. 꽃말은 명예, 영광, 그리움, 기다림을 뜻한다. 피를 맑게 해 주어 약용으로도 쓰인다. 장원급제 한 사람의 관모에 임금님이 꽂아주었던 어사화라 하여 양반 꽃이라고도 부른다. 볼수록 매력적인 꽃, 나는 능소화이고 싶다.


능소화는 유연한 줄기를 가지고 있다. 주위에 아무리 큰 나무들이 버티고 있더라도 그 줄기를 휘감고 올라가 삶의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햇빛이 오는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꽃을 피운다. 나에게도 능소화 같은 면이 있다. 독립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안전한 큰 나무에 의존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글을 쓸 때도 혼자 만족하는 것보다는 전문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 헬스를 할 때도 PT를 받아야 운동에 확신이 생긴다. 가정주부로 몇십 년을 살아도 내 음식에 확신이 없어 매번 핸드폰 요리 앱을 열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치를 깨닫고, 도전보다는 안전한 삶을 선택하는 모습은 꼭 능소화 덩굴 같다. 가능한 한 많은 줄기를 뻗는 것 또한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의 모습과 닮았다. 가지마다 소담스러운 꽃을 달고 있는 욕심쟁이 모습에 이루고 싶은 소망을 가지마다 매단 나의 모습이 보인다.


능소화 꽃은 탐스러운 주황색이며, 질 때는 벚꽃처럼 꽃잎을 날리지 않고 무심한 꽃송이가 툭하고 떨어진다. 그 모습은 마치 <낙화>라는 시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 구절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아는 사람, 나도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키우기도 쉽고 잘만 키우면 백 년도 넘게 사는 능소화, 지붕과 담벼락과 만나 낭만이라는 운치를 더하는 능소화의 존재감처럼 충만한 자생력을 가지고 낭만을 뽐내는 존재로 매일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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