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 아빠 김선택이 죽었다. 영하 10도가 넘어가던 날 자정 무렵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술에 찌든 선택의 원망과 분노는 살이 되어 유리와 엄마에게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년, 거지 같은 집구석, 우라질 딸내미.. 허가 꼬구라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마침 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선택은 그날따라 직접 술을 사겠다고 집을 나갔다.
"엄마, 도망가자. 왜 이렇게 살아. 난 더 이상은 못살아. 엉엉~"
"이것아, 조금만 참아. 엄마는 이러고 살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아이고, 내 팔자야. 박복한 팔자 같으니라고.. 에휴~~"
어둠은 그들의 한숨에 파묻혀 더욱 짙어만 갔고, 흐느끼는 곡소리는 로얄골드맨션의 자장가라도 되는 건물을 휘휘 돌아 문 열린 창문 틈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갔다. 입주민들이 들리는 곡소리에 자신들의 한숨 소리를 박자 삼아 그러려니 하며 아무렇지 않게 잠 속으로 빠져들 시각, 잠들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윗집의 길춘남이었다.
다음날, 선아 아빠는 로얄골드맨션 앞마당에서 죽은 체로 발견되었다. 경찰들은 꽁꽁 언 땅에 발이 미끄러져 즉사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수사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자기만의 가설을 세우며 조용히 술렁거렸다.
'원래 그곳이 물이 있을만한 장소가 아니래. 다른 장소에서 죽은 뒤 옮겨진 것을 아닐까?'
'누가 물을 일부러 뿌린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곳에 물이 얼어있다는 게 말이 돼?'
'평소에 얼마나 가족들을 패댔어. 혹시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랬을까?'
이런 말들이 맨션을 중심으로 계속 맴돌았지만, 나중에는 결국 잘 죽었다, 자업자득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심증에 의한 의심일 뿐, 목격자도 없었기 때문에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잊어버리려고 했다.
남겨진 선아와 선아 엄마가 장례를 치른 뒤, 어느 날 모녀는 모처럼 홀가분한 날을 맞았다. 멍이 가신 말끔한 얼굴의 선아 엄마는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선아에게 다가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제는 고생 끝이야. 하늘이 불쌍한 우리 모녀를 도왔나 보다. 선아야, 그동안 힘들었지? 엄마가 알아봤더니 그나마 하나 남은 보험에서 사망보험금이 지급됐더라. 우리 그걸로 당분간은 살 수 있을 거야. 선아야, 우리 둘이 다시 잘 살아보자. 알겠지?"
"정말이야? 그럼 돈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이제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갈 수 있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선아 어디 가고 싶어? 저번에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가자. 엄마도 바다보고 싶어. 우리 펜션도 예약해서 하루 자고 오자. 회도 먹고 수영도 하고.."
"정말? 진짜지? 와~~ 엄마 너무 행복해..."
그런데 조금 뒤,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아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쁘다면서 표정이 왜 그래?"
"훌쩍~~ 아니... 아빠가 있었다면 말이야. 아빠가 사업에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다 같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너 아빠한테 맞아서 피멍이 들었던 거 벌써 잊었어?"
"아니... 술 마시고 몽둥이로 때리고, 술병을 던지던 아빠는 정말 죽도록 싫어. 하지만 보험금 들어왔다고 웃는 내 모습을 보니 어쩌면 조금의 돈만 있었어도 아빠가 그렇게 변하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선아의 말에 엄마는 가슴이 뜨끔했다. 순간, 고개 숙인 선아 뒤로 과거 남편의 모습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 사업이랍시고 운영했던 가게는 콧구멍만큼 작았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은 사치가 심했던 엄마의 목에 차지 않았다. 매일 퇴근하는 남편에게 돈타령을 했고 이야기의 끝은 늘 싸움이었다. 돈! 그래, 그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싸움에 지친 남편이 홧김에 무리하게 가게를 확장한 것이다. 씀씀이는 줄어들 줄 몰랐고, 가게에 들어가는 돈은 더 많아졌다. 쌓여가는 고지서들, 대출금을 갚으라는 문자들... 남편은 그때 처음으로 절망을 맛보았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을.
연민을 슬금 올라오는 것을 느끼자 선아 엄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누구나 사업이 망했다고 마누라나 딸을 때리지 않아. 능력 없는 너희 아빠나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깟 사업 좀 망했다고 술 마시고 욕하고 피멍 들도록 가족들을 때린다고? 내가 그랬어? 내가 사업 망하라고 빌었어?
엄마의 손목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 선아가 얼른 숨을 삼키고 고개를 움츠린다.
"죗값을 받은 거야, 너희 아빠는! 이젠 아빠라는 단어도 지워버려. 그런 인간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선아 엄마는 선아의 손을 내치고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아는 좀 전에 행복했던 순간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아 엄마는 남편의 핍박에서 벗어나 이젠 더 이상 맞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거기다 칠천만 원이라는 돈도 생겼다. 지금껏 못해본 것, 하고 싶었던 것, 마음대로 하면서 살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자 갑자기 몸이 들뜨면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왔다. 선아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며 남편의 물건을 남김없이 버렸다. 밥공기와 칫솔까지, 같이 사용했던 수건까지, 마음 같아서는 같이 들이마셨던 공기까지 모두 버리고 싶었다. 선아 엄마는 시장에 있는 화장품 가게로 갔다. 화장품을 샀다. 옷가게에도 들러 옷을 샀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돌아오는 길엔 소고기도 샀다. 흥얼대는 콧노래를 멈출 줄 몰랐다.
'이젠 과거의 장말숙이 아니야. 난 지금껏 억울하게 살았어. 난 보상받아야 해.'
선아 엄마, 장말숙은 보험금이 나오자마자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었다.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다녔던 직장이었다. 장말숙은 지금은 상황이 변했으니 좀 더 그럴듯한 직장자리를 구해야겠다, 아니 돈도 있는데 당분간 좀 쉬자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불러 먹고 마셨다. 매일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들 자신에게 얼굴이 좋아졌다고, 이제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살라고 응원해 줬다. 장말숙은 친구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술값을 자신이 다 계산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이게 진짜 사는거지' 라고 느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장말숙은 매일 먹고 마셨다. 남편이 죽고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장말숙은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장말숙은 한껏 치장을 하며 콧노래를 부른다. 안방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선아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또 나가는 거야? 이번 주말에 진짜 통영에 놀러 간다고 했잖아. 잊었어?"
"아이~~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해. 진~~~ 짜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래, 통영 여행은 다음 주에 꼭! 꼭 가자. 엄마 이해해 줄거지? 호홍"
쫙 달라붙은 원피스를 입고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자 선아는 짜증이 났다.
"그럼 돈 좀 줘. 희망이가 설사를 해서 병원에 데려가봐야 해. 어제도 밤새 낑낑 거리는 바람에 윗집 아저씨가 문을 발로 차고 날리도 아니었어."
"돈? 돈은 무슨 돈이야. 강아지는 원래 설사도 하고 그러는 거야. 너도 설사하고 그러잖아. 그런데 병원에 안 가도 괜찮지 않았어? 그냥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뿌려대는 향수, 흥얼거리는 콧노래.
선아는 자신과 희망이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하는 엄마를 보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희망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리고 병원은 안 가더라도 돈 좀 줘. 집에 먹을 것도 없어. 내가 뭘 먹고 사는지 알기는 해? 엄마 돈은 있어? 혹시 아빠 사망 보험금 다 쓴 건 아니지?"
"얘가! 무슨 소리야, 당연히... 있지. 기다려 봐."
눈을 치켜뜨고 몰아붙이는 선아의 모습에 당황한 장말숙은 가방 안으로 부산스럽게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냈다.
"자, 자~ 여기 이만 원이면... 되지?"
장말숙은 지갑에서 아까운 듯이 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 내밀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선아 눈치를 보며 한 장 더 꺼냈다.
"현금이 이것밖에 없어. 아껴 써라. 그리고 오늘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 그럼 엄마 갔다 올게~ 호홍"
장말숙의 하이힐이 또깍또깍 소리를 내며 현관을 나갔다. 쾅하고 문이 닫혔다. 낑낑거리는 희망이가 뒷다리를 질질 끌고 와 선아의 발을 핥았다. 선아는 손에 쥐어진 삼만 원을 보며 변해가는 엄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떨궈진 선아의 머리 아래로 똑, 똑, 똑,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