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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과 쑥차, 그리고 봄

으른의 봄내음

by Hyojiya



현관문 앞에 던져진 택배상자 안에서 '맥파이 앤 타이거'의 차 3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진즉부터 시키고 싶었지만 다른 차들이 많아서 참다가 결국 주문해 버렸다.


감잎차, 쑥차, 호박차. 나의 한 달을 즐겁게 해 줄 30개의 티백에 마음이 설렌다.


뭐를 먼저 마셔볼까? 모두 논카페인이라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신중한 고민 끝에 쑥차를 골랐다. 봄이니까.


그런데 봄이어도 아직은 좀 춥다.






지난겨울 동안 평년보다 춥다고 느낀 게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감각은 아니었나 보다. 늘 베란다에 있던 벤자민(화분)이 얼었다. 2011년에서 201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이후 처음이다. 고로, 이 벤자민이 얼어버린 건 두 번째 일이다.


어느 날 물을 주면서 보니 잎사귀가 대부분 갈색으로 변해 있어 화들짝 놀라 낑낑대며 거실로 옮겨주었다. 얼어서 이미 생명력을 잃은 잎들은 손이 닿기만 해도 가을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잎이 없이 가지만 남은 벤자민은 기지개를 켜는 육감적인 여성의 몸매 같아 조금 민망했다. (두 번이나 얼린 주제에 미안해나 할 것이지 별 생각을 다한다고 여길 수 있지만 나는 아직도 구름을 보면서 토끼나 고래를 떠올리는 어른임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친정엄마는 죽은 가지를 다 잘라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강하게 말렸다.


"아니야~ 놔둬~~ 거기서 새 잎이 분명 돋아나. 죽은 거 아니야."





거 봐. 돋아난다고 했지? 죽은 거 아니라고 했지? (자랑이다...)



얼마 안 있어 마른 가지를 뚫고 작은 연둣빛 잎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기특한 마음에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한 손에는 쑥차가 든 머그컵을 들고 다른 손으로 여린 잎들을 살살 어루만져보았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새싹에 쑥차 향이 더해지니 우리 집 거실에 봄기운이 그득하다.


남편과 나는 계절마다의 냄새를 느낀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산책을 하는데, 2월 중순 이후부터 줄곧 "공기는 차도 미세하게 봄냄새가 섞어있다"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느끼는 그 봄내음에는 아직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땅에서 비밀스럽게 생명이 움트고 있는 쑥의 냄새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다 냉이나 쑥이 식탁에 올라오면 완연하게 봄이 왔음을 느낀다. 어려서는 무슨 맛있지 잘 몰랐던 봄나물의 맛을 알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된 것 같다.


추운 겨울 땅에서 가장 먼저 올라오는 식물들이 그렇듯 쑥도 강한 생명력 속에 좋은 성분을 많이 갖고 있다.


비타민C는 감기 예방에 좋고, 비타민A는 항산화 작용과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나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오히려 한겨울보다 감기가 잘 걸리곤 하는데, 올봄은 아직까지 괜찮다. 쑥차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성질이 따뜻하고, 간에도 좋아서 손발이 귀신처럼 차갑고(우리 엄마 표현) 간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보약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쑥차를 마시는 이유는 순전히 '맛있어서'이다.(아니라면 영양제를 먹고 말았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누군가 선물해 줘서 마셨던 강화도 사자발쑥도 향이 진하고 좋았지만 '맥파이 앤 타이거'의 쑥차는 결이 조금 다르다.


지리산자락에 돋아난 어린 쑥잎으로 만들었다는 이 차에서는 그냥 쑥냄새라기보다는 어려서 엄마 따라서 다녔던 한증막에서 맡았던 쑥뜸 뜨는 냄새가 난다. 그러니까 불에 태운 향이 있다는 거다.


가을 낙엽을 태울 때, 커피를 볶을 때 나는 그런 스모키한 향이 차맛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잎차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풋내가 거의 없고, 부드럽고 달콤해 입에 착 감긴다.


우리말로 하면 '까치와 호랑이'인 브랜드답게 이 회사는 한국적인 차들을 주로 판매하는데, 처음 마셔보는 종류의 차도 있지만 전에 마셔본 적이 있는 차도 이렇게 획기적으로 맛있으니 무슨 노하우인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나에게 처음 여기 차를 알려준 사람은 배우 김태리를 닮은 예쁜 여자후배 H였다. 누군가 그 얘기를 했을 때 선뜻 동의하지 못했는데, 사실 내 눈엔 이 후배가 더 예뻤기 때문이다.


외모도 그렇지만 이미지가 참 예쁜 사람이다. 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부드러운 태도 속에서 자기만의 분명한 삶의 기준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해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H와는 8년 동안 세 번이나 같은 팀으로 인연이 닿았고, 마지막 1년 반 동안은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소소하게 차나 간식, 문구류 등을 공유했는데, 은근히 소비요정인 그녀는 나에게 '신문물'을 가장 많이 알려준 사람이다.


요즘 필사노트로 사용하는 다이어리도, 아침마다 뜯는 재미가 있는 귀여운 일력도 H가 선물해 준 것들이다. 사무실 책상에 놓인 문진, 차 안에 있는 아로마 스톤, 내 생활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스며있다.






그녀가 처음 이 브랜드 차 여섯 종류를 구입해서 맛보라고 나눠줬을 때, '오설록'의 캔디나 풍선껌 같은 향들의 차가 조금씩 식상해진 무렵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맛과 향에 반해서 "너무 맛있다"를 수차례 연발했다.


근무지를 옮길 때 H는 나에게 이 차를 선물해 줬다. '주책없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으면...'하는 생각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같이 지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인 그녀가 오히려 언니 같이 느껴지던 순간이 많았다.


지금은 함께 근무하지도 않고 서로 일이 바빠서 연락조차도 거의 못하지만 이렇듯 나는 자주 그 후배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예쁜 사람, 고운 사람.






나란 사람은 분명히 고유성이 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스쳐지나온 많은 이들의 어떠함이 담겨 있다. 지금의 '효지야'는 내가 살아온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엔 좋은 것만 있지는 않지만 H는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 중 한 명이다.


나에게 삶의 소소한 재미를 많이 알려준 그녀와 나란히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소중하게 되새겨지는 봄날이다.


아직은 살며시 냉기가 느껴지는 이른 봄 같은 그녀에게 오늘은 안부를 물어야지. 쑥차가 내 몸에 퍼뜨려준 봄기운을 담아 고마움도 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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