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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차

개운하고 달콤한 한 잔

by Hyojiya



8년 가까이 근무하던 기관에서 나와 G시에 있는 초등학교로 오게 되었다. 8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았던 터인지라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었고, 헤어짐이 아쉬웠다. 오래 머물던 사람을 그냥 떠나보내면 서운할까 싶었는지 남는 이들은 떠나는 이의 손에 선물을 그득히 들려주었다.


하나하나 열어보니 대부분이 '차(TEA)' 선물이었다. '내가 이 정도로 차를 좋아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나도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 종종 차를 선물하곤 한다. 이유와 의도가 어쨌든 간에가지 차를 팬트리에 정리하면서 든든했다. 도토리를 잔뜩 모은 다람쥐가 이런 기분일까?


낯선 출근길에, 저녁을 먹고 난 후에, 나른한 오후에. 기분에 따라 차를 골라 마셨다. 이 향이 좀 나는 액체가 뭐라고 마음에 위로를 준다.


그렇다. 차는 나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다고 해서 꼭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닌데, 나의 취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학교 근무는 퇴근이 빠른 장점이 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 그래서 없는 솜씨지만 간단히 반찬을 만들기도 하는데, 오늘은 돼지 앞다리살을 고추장 베이스로 양념해서 볶았다. 된장과 매실청을 넣고 무친 배추나물도 함께 곁들여 저녁식사를 한 후에 연신 헌법재판소를 비추는 TV화면을 보고 있자니, 차가 당긴다.


오늘 고른 것은 '로열OOO'의 블루민트차.


루이보스, 민트, 캐모마일, 히비스커스. 이렇게 네 종류의 차가 각각 네 개씩 들어있는 포장은 고급스러워 보이면서도 어쩐지 살짝 올드해 보이면서, 결론은 묘하게 당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맥파이 앤 OOO' 차가 모두 소진된 후에야 개봉됐다. (지금 내 마음속 일 순위는 '맥파이 앤 OOO'다.)


종종 페퍼민트차를 마시지만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커피를 많이 마신 날 카페에서 마지못해 선택한 페퍼민트차는 맛이 좋다기보다는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알싸함과 개운함만 강하게 느껴졌던 차라서.






"아, 맛있다!"


한 모금 넘기자마자 소리 내어 감탄했다. 민트의 상쾌함과 은은한 단맛이 어느 한 가지의 지나침이 없이 아주 조화롭다. 한 컵을 거의 비울 즈음 온수를 리필했다. 뭐든 천천히 먹는 나에게는 찻잔 바닥을 보는 것은 은근히 어려운 일이다. 따뜻했던 차가 식거나, 아이스의 경우 얼음이 녹아서 묽어지면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다.


차는 포장에 적힌 설명을 지켜서 우릴 때 가장 맛있다. 물의 양은 살짝 오버돼도 괜찮지만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은 꽤 중요하다. 본전 뽑을 심산으로 욕심부리면 떫거나 텁텁한 맛이 우러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민트티는 재탕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민트차인데 얘는 왜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는 건지 궁금해서 성분과 함량을 보니 '박하'와 '페퍼민트'가 6:4의 비율로 블렌딩 되어있다. 의문점이 생겼다.


'박하'와 '페퍼민트'는 같은 게 아니었나?


척척박사 AI에게 물어보니 다른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박하'는 민트과 식물을 통칭하는 게 아니라 바로 '스피아민트(spearmint)'였다. 은은한 달콤함은 바로 이 '박하'가 주는 맛이었다. 달콤함은 역시 부드러움을 동반한다.






민트는 소화를 돕는다.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을 먹은 후에 마셔주면 개운함을 준다. 입 안에서는 이렇듯 알싸하고 화한 느낌이지만 속 쓰림을 완화해 준다고 하니 신기하다. 그리고 체온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어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마셔주면 좋다.


나는 아로마오일도 좋아해서 민트 네 종류가 블렌딩 된 오일에 라벤더와 로즈메리를 더해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다양하게 활용한다.


사무실 가습기에 넣어주거나 단순히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주기만 해도 코가 뻥 뚫리고, 기분 또한 리프레시된다. 특히 답답한 사무실이나 밀폐된 공간에 있을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머리가 미지근하게 아플 때는 관자놀이나 귀 뒤쪽, 뒷목에 찍어 바르면 두통약을 먹지 않고도 두통이 가라앉는 행운을 얻을 때도 있다. 열에 한 번쯤 말이다.





차를 홀짝이다 보니 이름이 참 예쁘다. 블루민트. 정작 차의 재료가 되는 식물의 잎은 초록색이지만 민트는 왠지 블루가 더 잘 어울리니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민트색의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배스킨OOO'의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색깔.


지금은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지만 어릴 적에 나는 항상 싱글레귤러콘으로 민트초코를 먹는 '민초파'였다. 친구들은 치약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은 별로라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엔 친구가 가장 좋아한다던 피스타치오맛을 골라보았지만 내게는 여기서 오히려 묘한 약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결국 끝까지 먹지 못하고 버렸다. (지금이라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 입에는 개운함과 달콤함이 공존하는 민트초코가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치약맛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한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성인이 되면서 뒤늦게 깨어난 자의식이 자존감을 갉아먹고, 꽤 오랜 기간 과잉상태를 유지하며 심각한 감정노동을 자처하고 있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고 틈만 나면 스스로를 점검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나만의 보이지 않는 잣대를 남에게 꺼내 들기도 한다.


공자가 괜히 '불혹'이라 명명한 건 아닌지,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많이 초연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못하겠다. 그건 어쩌면 죽음을 맞이할 때에라야 가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하던 시절이 그립다.


천진함으로 무장하고 당당하게 홀로 우뚝 서있던 그 아이가 이왕에 떠올랐으니 마음속에 살포시 품어 본다.






그때 친구들과는 아쉽게도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다. 어떤 어른이 되어 살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나처럼 민트차를 마시며, 치약맛 아이스크림 속 초코칩을 앞니로 오도독 씹던 똑단발의 효지야를 떠올리고 있지는 않으려나.


맛있는 민트차는 나로 하여금 붉은 계열의 체크무늬 교복을 입던 여중시절의 깜찍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해 줬지만 이 차는 민트초코처럼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


오늘의 나른한 오후, 민트차 한 잔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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