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빨간 맛
"근데~ 피부에 뭐 해요?"
"저 피부 별로 안 좋은데? ○○님이 더 좋으신데요, 뭐~ 저는 아직도 가끔 뭐가 나고 그래요."
"그럼 화장발인가?"
'삐~~~~' 마음속에서 위험이 감지됐다. 화장빨? 선 넘네?
1월부터 함께 근무하게 된 그녀는 소문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겪어봐야 아는 거니까 함께 잘 지내보려고 상냥하게 대한 것이 문제였나 보다.
"머릿결도 좋네. 미용실 자주 가요?"
"글쎄요... 머리 할 때가 되긴 했는데..."
"에이... 이런 사람들 보면 꼭 그렇게 말하더라."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며, 내가 언제 나에 대해 품평을 해달라고 했던가? 잘 지내긴 그른 거 같다.
"저 외모에 그렇게까지 투자 안 하니까 몰아가지 마시죠."
잠시 침묵한 후에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냥 웃어넘기면 이런 은근한 공격이 계속 들어올 것 같았고, 그렇다고 허구한날 비아냥거림과 기싸움을 벌이면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후로 나는 그녀에게 상냥함을 거두었고, 그녀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입만 열면 기승전'남 탓'으로 이어지고, 자기돈 안 들이고 먹는 것을 좋아하며, 웃음소리가 유난히도 경박한 그녀의 언행들을 볼 때마다 '구질구질'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내가 품어줄 도량이 안 돼 안타깝기도 하다.
오늘도 나에게는 마음을 달래줄 차 한 잔이 필요하다. 와인처럼 예쁜 빛깔의 차를 잔에 따르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무슨 차냐고 묻는다.
"히비스커스."
"한 모금 마셔봐도 돼?"
"당연하지~"
"음... 오미자 맛 난다."
과연 그랬다. 마실 때마다 짭조름하면서 시큼한 맛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미자 맛이었다.
히비스커스는 주로 아열대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꽃은 커다란 꽃잎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빨강, 노랑, 주황 등 색이 화려하다.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같은 속(屬)의 식물이라서 그렇다.
히비스커스차는 꽃을 건조해서 우려낸 것으로 항산화 효과가 있고, 소화기능 개선과 혈압 조절에 도움을 주어 일부 문화권에서는 전통 약재로 쓰인다고도 한다.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차는 히비스커스와 로즈힙이 함께 블랜딩 되어 있는데, 로즈힙은 장미 속(屬) 식물의 열매로 일반적으로 붉은빛의 타원형을 띤다.
마찬가지로 항산화 물질과 비타민C, 비타민A, 식이섬유와 미네랄이 풍부해서 면역력 강화와 피부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하니 꾸준히 마시면 여러모로 이롭겠다.
그렇지만 이렇듯 좋은 효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솔직히 내 입에는 계속 당기는 맛은 아니다. 한 모금 머금은 순간 단맛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곧장 짠맛과 신맛이 압도해 버린다.
특히 산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친해질 수 없는 맛일 것 같은데, 그럴 경우 '오설O'의 '스윗 히비스커스'를 추천한다.
'스윗 히비스커스'는 과일향과 시나몬향이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단맛도 있어서 술술 잘 넘어간다. '오설O'다운 편법이다.
질감도 묵직하달까? 걸쭉하달까? 마치 잘 끓여진 '뱅쇼'를 마시는 느낌이라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마셔주면 움츠러들었던 몸도 마음도 누긋하게 풀어질 것 같다.
고운 빛깔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투명 잔에 마실걸 하는 후회가 든다. 이 색은 두 해 전인가 팬톤컬러로 선정한 '마젠타'와 매우 비슷하다.
고운 빛깔에 감탄하다 보니 공교롭게 TV 화면 속에서 무리 지어 호소하는 사람들의 착장에서도 붉은색이 보인다. 저마다 그 색이 아니면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경을 쓴 느낌이다.(지금껏 살면서 뉴스를 이렇게 열심히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나란 사람은 원래 정치에 '1'도 관심이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보통의 선한 마음과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
일상에서도, 매체 속에서도.
내가 스무 살을 갓 넘긴 2002년, 온 나라를 물들였던 빨강은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냐 반문해 보아도 적어도 분열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가 한창 세계 국기에 빠져 지내던 꼬꼬마 시절, 국기에 들어가는 붉은색은 희생, 용기, 자유, 독립, 민족과 통합 등의 긍정적인 의미들을 지닌다고 본 기억이 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빨강'은 원래 고운 빛깔을 대표하는 색이고, 이렇게 좋은 의미도 많이 가진 색인데...
극단으로 치닫는 이 시대의 붉은색은 우려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닐 것 같다.
괜찮은 걸까?
괜찮아지는 걸까?
당분간 주에 5일 얼굴 보고 지내야 하는 회사의 그녀를 포함한 이런저런 걱정 속에 500ml 양의 히비스커스차를 거의 다 마셨다.
단맛 뒤에 짭짤하고 신맛이 나는 이 차의 매력을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입안에 남는 것이 없이 아주 깔끔하다.
오늘은 어쩐지 많지 않은 월급과 고운 빛깔의 차 한 잔에도 여유를 느끼며 안분지족 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좀 품위 있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