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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Feb 04. 2022

열정에는 찬물을. 분노에는 기름을. 감정엔 죽음을.

2021년 3월의 어느 날

2021년의 1/4를 분리하며,

나의 작금이야, 활활 타올라라. 내일이고 모레고 재야 펄펄 날려라. 해를 가리고 달을 숨기는 규모를 이룰 때까지 연소를 멈추지 말아 다오.

가늠? 가늠하는 것은 여유 넘치는 자가 하는 기만이다. 자비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나는 가늠할 수 있는가? 이제는 있다. 왜냐면 오늘 나는 이 굽이굽이 놓인 비탈길을 걷는 법을 대강 알았으니까. 조심해서도 안되고 부주의해서도 안 되는 아이러니의 강제로 인한 깨우침. 감사합니다.

영감은 문득 찾아온다. 지금 내가 타고 지나는 지하철의 선로 밑에도 있을지어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스크린도어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찾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내가 놓은 넋 덕에 지루함과 도망쳤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잘 몰랐네, 다만 나를 믿는 일은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게 나의 특성이자 강점이라는 것을 타인의 거울에 비추어 알아내었다. 글을 쓰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오히려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보다 몇 년간 써놓은 글이 나를 더 잘 설명한다. 잡동사니를 쓸어 담는 일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통찰은 쉽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산에 사는 아이가 어찌 고래의 거대함을 알리오. 바다의 아이가 어찌 자신을 죽이는 독초를 구분하겠는가. 나의 통찰은 내가 뛰놀던 놀이터, 조금 넓혀 보아서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의 공간에서 유효하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 너는 이런 사람인 것 같네.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평가는 생각보다 정확해서 늘 지표가 되었다.

피는 언젠가 멎고 상처는 언젠간 아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 날카로움이 나의 살갗을 파고들어 지나간 지 수 초 밖에 지나지 않은 것을. 내 살점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에 향한 증오의 시선은 머지않아 급히 자상으로 향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강함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영양가 없는 상처가 생겼다.

당장 내일 백만장자가 되어도, 내일 차에 치여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삶임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황스러우리만큼 가까이 있던 나의 근처에 흐르는 자본, 당장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정확히 이루어졌다.

어찌 됐건 이상하지 않은 일은 도사리고 그것은 영감과 같은 양의 감정뿐만이 아니고 강점뿐만이 아니다. 음습함이 도사리는 감정과 나의 단점을 적당한지 아닌지 알기에는 틑어내야 하는 누빔과 박음질이 너무 많았다. 완력을 가진 불안감과 싸우는 일은 내가 친구와 일본 신주쿠 거리에서 맞닥뜨렸던 혼란감처럼 곳곳에 사은품으로 존재했다. 글을 쓰게 해 주었으니 분리수거가 수순이다.

밑바닥. 아래의 아래. 맨 위의 위와 닿아있는 지점. 왜냐면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둥그니까 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내가 굉장히 별로인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 우리가 프로토스처럼 신경을 통해 오해 없이 소통했다면 좀 나았을까? 내가 누군가의 말에 혹여 숨어들었을지 모를 악의를 철저히 걸러낼 수 있다면 좋았을 노릇이다.

때문에 더 이상 내 삶의 그 누구도 나를 향해 주사위를 굴리지 않게 하는 것. 그게 내 몫이로다. 1부터 6까지의 숫자는 동일하게 구른다. 상승과 추락. 뉘앙스가 담긴 그 말에 사실은 가능성이 있다. 빙글빙글 돌며 상승, 같은 궤도를 그리며 추락. 구르고 굴러 마침내 나온 오늘의 숫자는, 7 혹은 0.

기름 같은 걸 끼얹나? 반영구적 행복을 찾았기에 신경을 끄려 했던 일들의 불길이 사라졌다. 부어버리고 또 부어버렸더니 태울 것을 잃고 꺼진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곳의 진화를 마쳤으니 다음 방향성을 결정해야 하는 날이 분명 올 테지만 추구하는 것 자체에는 어폐가 없다. 너희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결국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은 누구? 그 뒤를 따라 걷던 사람들이다. 올라타면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을 꽉 쥔 손아귀와 정신을 놓지 않을 각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 알고 있다고 해서 꼭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도 제 몸을 개복하고 수술 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혹은 다 알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거짓이거나. 생각은 길게, 말은 짧게. 성숙의 원리가 단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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