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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Feb 04. 2022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2022년 2월 4일

어느새 고장 난 마음은 잠시나마 감정을 융통해 고쳐지고, 내 맥북은 비로소 소명을 다하고 고장 난 어느 날에.


나는 비로소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호소를 마쳤다. 4년 전 글 속의 나는 무언가 결여된 남처럼 느껴졌지만 불과 1년 전의 나에게서는 오늘의 나와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찰하면 할수록 나를 점점 미궁에 빠뜨릴 뿐이었다. 상태가 점점 나빠질 뿐.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3자의 관점에 의해서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땅에서 멀어지는 행위는 하늘과 가까워지는 반항적 행위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위는 땅과 맞닿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의 암시이니.


노트북은 고장 났다. 영원할 것만 같은 기계도 결국 고장 난다. 뭐 하나 망가지지 않는 것은 없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 마냥 요란하게 팬이 돌아가고 화면에 표시된 CPU 온도는 굉장히 높았다. 배터리는 부풀었고 교체를 하였음에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사용해온 물건에는 애정이 있다. 나는 내 물건에 굉장히 애정을 쏟는다. 이제 쓰는 글들이 웬만해서는 이전의 내가 다뤘던 소재이다. 내가 물건을 아낀다는 이야기는 여태 써온 글 곳곳에 있다.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물건이 망가지거나 사라지는 일은 나에겐 감정적인 감상을 불러온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며 사용했던 물건들. 내가 감정과는 다르게 변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나의 곁에 있던 것들.


16살에 베가스에 있는 나이키 매장에 가서 산 나이키 신발. 당시 한국에서도 인기 있던 모델을 아무것도 모르고 온 내가 타국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낯선 기쁨이었다. 어머니가 주신 100달러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소비로 이루어졌다. 기쁜 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그 신발을 신고 학원에서 집으로 오던 길에 개똥을 밟았던 기억이 난다. 몹시 불쾌했지만 신발을 세척하면서도 나는 그까짓 오염이 내가 이 신발을 사랑하는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10년 전의 내가 지금보다 영원불멸의 가치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 모습이다.


어느샌가 발라드를 자주 듣지 않는다. 어떠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투버는 그저 편안한 스몰토크를 주고받으며 소소한 웃음을 주는 영상이 대부분이었고 이제는 그러한 즐거운 백색소음이 나의 일상을 채웠다. 일을 하고 작업을 해야 할 때는 음악을 틀어두었다. 아주 큰 소리로. 이어폰이 꽂힌 귀에도 아주 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음악이 아니다. 노래도 아니다. 그저 시끄러운 소리로 나를 고립시키는 일종의 진동인 것이다. 이태원의 지하 작업실에, 분당의 햇살 드는 작업실에.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들은 홀로 체득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혼자 있을 것이다. 영영 혼자일 것이다.


비로소 마른 잎을 발견했을 때 나는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랬다. 내가 원하는 건 불길이었으나 내가 당장 찾아야 하는 것은 고작 이 말라 부스러진 나뭇잎이었다. 어순이 잘못된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가 저 집채만 한 화염을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잘 마른 불쏘시개를 마련하는 정성. 그것이 내가 나를 위해 마련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제 타인이 나의 삶을 담보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이유를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이 아프고 아픔을 주었는지.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과 마음과 생각은 하찮음을 잃었다.


그간 써놓아 둔 글을 다 옮겨 담았다. 그리고 글을 썼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홀로 나의 마음을 달래다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 마음을 공유하며 위로받았던 시간들. 그리고 불쑥 모종의 상심들은 다시 나를 숨게 했다. 감정을 꺼내기는커녕 속에서 썩히고 있을 때, 글을 쓰지 않고 있던 때. 다시 글을 옮기며 돌아본 나는 다시 전화기 메모장에 속상해하며 글을 적던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오늘은 흔히들 듣는 감성적인 노래를 들으며 삐뚤한 감상을 적는 내가 있다.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에 많은 말들이 머리와 마음을 드나들었지만, '영민한 자의 영리함은 그 영민함을 숨기는 데 있다.' 어디서 들은 것인지. 내가 어떠한 소통과 대화의 단절을 결심하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단계에서 흰 천에 덮인 이들을 뒤로하며 겪었던 경험은 나를 깨우쳤다.


정말 오랜만에 이전에 듣던 노래와 같은 장르를 들었다. 백색소음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문세 님의 사랑이 지나가면.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아아, 정말 길었다. 삶이 준 숙제는 예습도 복습도 되지 않고 언제나 그저 맞닥뜨릴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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