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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Feb 08. 2022

삶의 주사위는 정육면체가 아닐 확률이 높다

2021년 3월 11일

'적당한' 스트레스는 활력을 준다.

적당? 너무도 주관적인 견해라  말을 잃었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 일갈로 들린다. 이미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영감은 문득 찾아온다. 지금 내가 타고 움직이는 지하철의 선로 밑에도 있을지어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스크린도어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찾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내가 놓은  덕에 지루함 함께 도망쳤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잘 몰랐네, 다만 나를 믿는 일은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게 나의 특성이자 강점이라는 사실을 타인의 거울에 비추어 알아내었다. 글을 쓰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오히려 내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보다 내가 몇 년간 써놓은 글이 나를 더 잘 설명한다. 잡동사니를 쓸어 담는 일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통찰은 쉽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산에 사는 아이가 어찌 고래의 노래를 알리오. 바다의 아이가 어찌 그대를 죽이는 독버섯을 구분하겠는가. 나의 통찰은 내가 뛰놀던 놀이터, 조금 좋게 보아서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의 공간에서 유효하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 너는 이런 사람인 것 같네.


피는 언젠가 멎고 상처는 언젠간 아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 날카로움이 나의 살갗을 파고들어 지나간 지 수 초 밖에 지나지 않은 것을. 내 살점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에 향한 증오의 시선은 머지않아 급히 쓰린 자상으로 향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강함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영양가 없는 상처가 생겼다.


당장 내일 백만장자가 되어도, 내일 차에 치여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삶임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황스러우리만큼 가까이 있던 나의 근처에 흐르는 자본, 당장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정확히 이루어졌다.


어찌 됐건 이상하지 않은 일은 도사리고 그것은 영감과 같은 양의 감정뿐만이 아니고 강점뿐만이 아니다. 음습함이 도사리는 감정과 나의 단점을 적당한지 아닌지 알기에는 틑어내야 하는 누빔과 박음질이 너무 많았다. 완력을 가진 불안감과 싸우는 일은 낯선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혼란감처럼 곳곳에 사은품으로 존재했다. 글을 쓰게 해 주었으니 분리수거가 수순이다.


밑바닥. 아래의 아래. 맨 위의 위와 닿아있는 지점. 왜냐면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둥그니까 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내가 굉장히 별로인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 우리가 우주 종족 프로토스처럼 신경망을 통해 오해 없이 소통했다면 좀 나았을까? 내가 누군가의 말에 혹여 숨어들었을지 모를 악의를 철저히 걸러낼 수 있다면 좋았을 노릇이다.


때문에 더 이상 내 삶이 주사위를 굴리지 않게 하는 것. 그게 내 몫이로다. 1부터 6까지의 숫자는 동일하게 구른다. 상승과 추락. 뉘앙스가 담긴 그 말에 사실은 가능성이 있다. 빙글빙글 돌며 상승, 같은 궤도를 그리며 추락. 구르고 굴러 마침내 나온 오늘의 숫자는, 7 혹은 0.


기름 같은 걸 끼얹나? 반영구적 행복을 찾았기에 신경을 끄려 했던 일들의 불길이 사라졌다. 부어버리고 또 부어버렸더니 태울 것을 잃고 꺼진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곳의 진화를 마쳤으니 다음 방향성을 결정해야 하는 날이 분명 올 테지만 추구하는 것 자체에는 어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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