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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Feb 09. 2022

위인은 보통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곳에서 온다

2021년 3월 29일부터 4월 20일까지

#3월 29일

불쾌한 기분이 역력했다. 내가 모르던 나의 시간들은 나의 분신을 계속해서 생산해냈고 그 결과 26살의 나는 갖은 파도와 고난에 맞닥뜨렸다. 내가 앞으로 넘어야 하는 산의 비탈길과 바다의 높은 파도는 그저 발길을 옮기기만 한다고 해서 쉽게 다음 고지를 내어주지 않을 기세로 나를 기다렸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의 개인적 결핍과 단점으로 짓이겨진 시간에 대한 보상은 내다 버린 귀중한 시간의 결과와 함께 철저히 뭉개지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4월 4일

할 일이 많은데 잠시 놓아두는 것을 우리는 바쁘다고 이야기하기로.


일주일 전에 산 게임기를 다시 돌아온 주말이 가까워서야 실컷 만져볼 수 있었다. 배송된 택배의 개봉을 미루는 주변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그간의 나의 기대감은 다른 이들의 귀찮음보다는 심히 강렬했나.

결국 스르륵 하고 넘어갔다. 조각배는 반파되고 내가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저어대던 노는 어느새 손에서 빠져 깊은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죽으라는 법은 없는 듯 금세 육지에 닿았다. 안도의 순간은 찰나로서만 우리에게 온다.


#4월 16일

양이 늘어나면 질이 바뀐다는 사실은 저명하다. 얼음이 녹아 물이 많아진 콜라의 맛은 밋밋하니까. 하지만 수많은 물방울을 우리는 바다라고 부른다. 질은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호불호,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다. 세포, 조직, 기관이 모여 개체가 되는 일. 과학을 못하는 내가 생명과학 수업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말.


존재의 증명. 존재의 증명. 존재의 여부를 해치는 일은 나를 좀먹는다. 정이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끊어내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행위로 인해 내가 흐려지는지 아닌지 점검해보게 된다. 밤이 되면 난시 때문에 방사형으로 퍼져 보이는 빛들. 너희는 그런 객체들이다. 가끔은 나에게 본의를 모르게 하는 이들인 것이다.


자주 쓰던 말이었던 통찰과 관통하는 시대정신. 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그 정도의 사태 파악도 안 된다면 몹시 무감각한 사람이라고 분류했다. 상투적인 일로 보이는 개척자와 피 개척지. 즐겨 쓰던 주제들은 이젠 투박하다. 소실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나. 실망할 필요 없다. 관망만이 우리의 태도일지니.


맛대가리 없는 식품들의 때깔이 꽤나 좋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와 호롱이 달렸다. 낮고 지저분한 늪지와 습지에서 연꽃이 피네. 행복과 감사를 호흡처럼 찾고자 원했으나 정작 그런 공기를 들이마시니 나의 위치는 생각보다 쾌적한 곳이 아니었던가.


가짜들이 떨어져 나가는 시간. 주체를 가지고 내 삶에 있어서의 가부를 판단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기분과 컨디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 고양감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마 일반적인 상태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생각했다.


처음 운전대를 잡고 달려본 고속도로에서의 속도는 시속 100km가 조금 안됐다. 아빠 차 뒷자리에서 졸며 어릴 적 목격했던 붉은빛이 내 앞 도로 곳곳에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앞차의 신호를 믿는 것 외에는 가로등이 없는 고속도로에서 안전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차종도 번호판도 명확하지 않은, 운전자는 더더욱 의뭉스러운 앞차의 붉은 브레이크등이 내 생명을 책임지는 빛이라니.


#4월 20일

나를 불행하게 만들던 것들로부터의 탈출. 존재는 영향력을 가진다. 고가도로 위의 초록잎도 누군가에게는 가삿말이 된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세상에 뿌려진 미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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