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이제 나에게 가을은 미움의 계절이 되어버렸다. 낮과 새벽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일관하기 어려운 시간이 오면 언제나 누군가를 미워했던 나의 방은 더 자욱해졌다. 개미처럼 열심히 준비했던 외투를 입을 수 있는 회백색 계절이 되고 나서야 연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디론가 빠져나가 버렸다. 사실 베짱이가 되고 싶었다. 낭만은 없는 대비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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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잊혀지는 것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 볼을 깨물어서 피가 철철 났다. 깨 문건 찰나인데 난 며칠의 식사 동안 쓰라림을 함께 삼켜야 했다. 허리의 근육은 쉽게 피로해져서 리프팅을 하려면 평소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 좋지 않은 자세로 생긴 디스크는 나에게 운동을 강요했고, 이젠 좋아하게 된 운동을 하기 위해서 삐딱한 자세를 지양한다. 추하고, 번거롭지만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대개 그런 식이다. 원해서 가져보면 다른 것을 잃어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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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객체를 잃는 과도기는 항상 슬픔이 있고. 나는 보통은 슬픔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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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 흘러 닿은 곳. 뒤돌아가던 오래전 어떤 기억을 불러 세운 날. 어두운 버스 안에서 살며시 기댄 작은 머리를 보며 나는 갖가지 생각을 되돌려봤다. 그때만 해도 친구라는 건 연인으로 가기 위한 환승역쯤으로 여길 어린 때였으니까. 하지만 별안간 치킨집 아주머니가 여자 친구랑 잘 어울린다면서 너스레를 떨었을 때 되돌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부정하며 손사래를 치던 나의 모습을 넌 어떤 창을 통해서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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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잘 모르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너. 내가 잘 모르는 브랜드의 옷을 좋아하는 너. 나는 지나가지 않는 역의 가보지 않은 길에 있는 생소한 카페를 집보다 편히 들락날락하는 마음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것이며 네가 남긴 잔향을 어찌 내가 들이마실 수 있을까. 코를 막은 것은 이제 절대 알 수 없는 노래. 절대 구매할 일 없을 브랜드. 절대 타지 않을 노선의 지하철. 애초에 마시지 않았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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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부터 그대를 위해 살고 싶다는 묵직한 생각을 저 발치에 두고 왔다. 머리맡에 놓인 100과 99는 달랐다. 적어도 나에게는. 삶을 소진해 지켜낼 것을 두고와 없는 사람이 어찌 깊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걷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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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지 못함은 오해를 낳고 이내 가랑비와 같이. 닦이지 않은 오염과 같이 스며든다. 내가 바깥에서 맞아 달고 온 빗물은 어디의 빗물받이에 떨어졌을까. 뚝뚝, 바닥에 떨어뜨린 물방울은 얕고 흐린 발자국을 대신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걸어온 길의 어디에 우산을 두었는지 챙겨주고, 흘러내려 모인 빗물이 담긴 통을 내가 먼저 눈치채어 비워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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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니라서 다행인 일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기였는지 아닌지 결정해야 할 때. 이루어졌을 때의 기쁨을 그렇지 않았을 때의 안도감이 압도할 때도 있으니까. 오른쪽을 보며 왼쪽을 볼 순 없고 바닥에 놓인 동전은 한쪽 면만 우리에게 보여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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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랑으로 뒤바뀌어 괜스레 잃어버린 것이 된 우정을 떠올린다. 대학생이 된 이상 고등학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버려진 마트처럼 최선 같은 건 애초에 없었을 때 필요로 했던 차선과 차악. 무리하여 얻어보면 그 속엔 한 오라기의 여유도 없는 그런 거. 시간은 편도뿐이라 우리를 애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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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을 보는 일을 좋아한다. 은은하고 느리게 흔들리는 작은 불. 별거 아닌데 마음을 홀린다. 향초에 별로 관심 없던 시간 동안은 가끔 라이터를 켜보곤 했다. 손아귀에 힘이 많이 없던 어린 날에는 라이터를 잘 켜지 못했다. 더군다나 부싯돌을 돌려서 켜는 라이터는 겁 많은 나에게는 친해지기 어려운 도구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켠 그 작은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 멍해져 라이터의 쇠가 뜨거워지는 것도 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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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는 건 언젠간 꺼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입으로 바람을 후 하고 불면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림자도 소리도 없다. 이내 방을 잔잔히 덮던 향초의 향을 비웃는 심지 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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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열과 향의 뒤에 오는 것, 끝이란 건 항상 그래. 필연적으로 창을 열어놓게 된다. 새벽의 찬 공기가 들어온다. 미움의 계절의 바람이 탄내의 자리를 빼앗는다.